중증의 ‘불량국가(rogue state)’. 박근혜 게이트가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국의 진면목이다. 암담한 사실은 이 게이트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이다. 정치·경제·교육·문화 등의 영역은 갖가지 형태의 반(反)민주성으로 한국을 다층적 ‘불량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살려낼게, 민주주의.” 광화문 촛불시위에서 등장한 피켓에 쓰인 말이다. 피켓을 든 초등학생의 해맑은 얼굴과 ‘살려낼게, 민주주의’라는 문구가 겹쳐진 이 장면은 포스트 탄핵에 들어선 우리에게 엄중한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이제 더욱 치열하게 추구해야 할 과제란,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한 민주주의를 살려내기 위한 결의와 그에 대한 구체적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을 촛불시위에 나온 초등학생이 우리에게 웅변한다.

민주주의란 언제나 약속으로 남아 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그 온전한 구조가 인간의 현실 세계에서 완벽하게 실현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크 데리다의 개념인 ‘도래할 민주주의(democracy-to-come)’는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미래’가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미래를 기억하는 것은, ‘아직 아닌 세계’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체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국민에 의한 정치’라는 뜻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야 할 이상을 담은 핵심적 가치가 있다. 바로 자유와 평등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중심에 있는 ‘국민(demos)’이란, ‘데모스의 아포리아’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매우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국민이란 다양한 개별성과 독특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이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개별적 존재로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 자유의 범주 및 그 내용을 어떻게 확장하느냐의 문제와 지속적으로 씨름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이다. 이러한 개별적 존재로서 국민의 자유는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로 보장받아야 한다. 둘째, 국민은 개별적 존재임과 동시에 보편적 존재이다.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각기 다른 두 측면이 국민 속에 공존한다. 보편적 존재로서 국민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평등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개별인의 성별·계층·장애 여부·종교 그리고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법적이고 제도적으로 그 보편적 평등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보편적 평등을 이루어내는 것은 현재 한국에서 요원해 보인다.


ⓒ연합뉴스 2월25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시국 촛불집회 현장에서 아이들이 팻말로 촛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가리고 있다. 2017.2.25

예를 들어 대선 후보로 나온 여당 후보는 물론이고 야당 후보들도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거나 결론을 유보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에 포함된 성적 지향의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에 단지 찬성한다고 해서, 여러 형태의 차별 문제에 대한 예민성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젠더·장애·계층·종교·학력·성적 지향 등에 근거한 차별에 대한 인지를 확장하고 평등의 지평을 심화시키는 것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필연 조건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민주주의를 기억하고 실현하는 결의

국민이란 단일한 집합체가 아니라 사회적 계층·장애 여부·성별·학력·종교·성적 지향 등의 다양성을 지니고 구체적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개별인들이 모인 것이다. 그 개별인들이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누리며, 삶의 조건에 근거한 여타의 차별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평등한 제도적 보장을 받는 것이야말로 한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국민 개별인의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한에서, 진정한 주권 행사가 비로소 그 의미를 발현할 수 있다.

문제 많은 대통령을 파면했다고 해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고 그것이 제도화되는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보편적 평등과 개별적 자유가 확산되는 사회, 이것이야말로 포스트 탄핵의 한국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호명될 때,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평등,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사회·정치적 권리를 지닌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차별·편견·배제가 사라지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의식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다층적 정의·자유 그리고 평등을 확보하는 것이 포스트 탄핵의 한국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지속적인 과제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이상이 한국 사회 곳곳에서 작동되도록 제도화와 일상화가 실현되는 ‘다가올 민주주의’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살려낼게, 민주주의’의 촛불 혁명이 호명하는 국민이며, 포스트 탄핵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엄중한 과제이다.

기자명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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