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의 태양은 심페로폴 공항에서 얄타로 가는 길의 버스 차창 위로 내리쬐었다. 밖은 찬바람이 쌩하게 부는 한겨울이다. 지난 2월9일 오전 9시40분 모스크바 공항을 출발해 오전 11시30분 크림공화국 주도 심페로폴에 도착했다. 얄타가 흑해의 유명 휴양지가 된 것은 한겨울에도 영상 2~4℃를 유지할 만큼 날씨가 포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예외적으로 추웠다. 비행기 트랩을 나서자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온 곳이다. 특히 1945년 2월4~11일 미국·영국·소련 3국 정상의 얄타회담은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권 등장 후 ‘얄타 2.0’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크림반도 얄타 방문기를 두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비행기 안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 의문을 제기했다. “밑을 내려다보니 검은 것은 바다가 아니라 땅이다. 바다 색깔은 오히려 푸른데 왜 흑해라 하는가.” 맞는 얘기였다. 비행기 차창으로 내려다본 흑해는 검지 않았다. 푸른색이었다. 이곳 사람들도 흑해를 푸른색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유달리 푸른색이 눈에 많이 띄었다. 코발트에서 블루까지 농담의 차이는 있지만 공항청사, 주유소, 교통표지판, 심지어 그리스정교의 예배당까지 흑해의 푸른색을 닮았다. 그런데 왜 흑해라고 부를까? 심페로폴 공항에서 합류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교수는 “평상시 흑해는 푸른색인데 격랑이 일면 검은색으로 바뀐다”라고 설명했다. 푸른색은 격랑이 일기 전의 흑해, 즉 평화를 뜻했다.

ⓒ시사IN 남문희흑해의 유명 휴양지 얄타는 크림반도에 있다. 위는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얄타 시내 전경.
도로 사정은 염려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심페로폴 공항에서 얄타의 호텔까지 비포장도로를 두 시간 동안 달려야 한다고 했는데 그보다는 양호했다. 인가가 있는 마을 풍경이 간간이 나타난다. 단층과 이층집들이 넓은 들판의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유목민의 게르를 외양만 바꾼 듯했다. 토박이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러시아인도 우크라이나인도 아닌 ‘크림타타르인’이라고 한다. 크림타타르의 연원은 칭기즈칸의 몽골족 후예들이 세운 킵차크한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 오스만튀르크의 지배가 겹쳐지며 크림타타르의 원형이 형성된다.

러시아가 이곳을 장악한 것은 캐서린 2세 때인 1783년이다. 독립심이 강한 크림타타르인들은 스탈린 정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진주하자 독일 편에 선 사람들이 많았다. 1944년 5월 스탈린은 이곳 인구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19만3865명의 크림타타르인을 중앙아시아 등 내륙 곳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연해주 한인의 강제 이주와 같은 운명이었다.

독립심 강했던 크림타타르인들의 고향

상념에 싸여 차창 밖을 무심히 보고 있는데 ‘얄타 40㎞’라고 쓰인 표지판이 얼핏 지나갔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흑해가 살짝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산비탈을 따라 포도밭의 장관이 펼쳐졌다.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 최대의 와인 산지다. 그 우크라이나산 와인의 대부분이 바로 이 크림반도에서 생산된다. 얄타에는 일찍부터 ‘마산드라’라는 세계적인 와이너리가 있어서 명사들의 발길이 이어져왔다. 마치 군대 사열하듯 끝없이 도열한 포도밭의 나무 받침대들 위로 흑해의 강렬한 태양이 내리쪼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봤던 앙리 마티스 그림의 지중해식 풍경이 떠올랐다.

ⓒITAR-TASS1945년 2월 얄타회담을 위해 모인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앉은 이 왼쪽부터).
오래전 헌책방에 갔다가 〈얄타 비밀협정-미 국무성 발표 전문〉이란 책을 샀다. 합동통신사는 이 책의 초판을 단기 4289년(1956년) 3월21일에 찍었다. 출판된 지 60여 년 된 책이다. 1945년 2월 얄타회담과 그 직전 루스벨트와 처칠 간에 있었던 몰타회담을 둘러싸고 미·영·소 3국 사이에 주고받은 극비 전문을 1955년 미국 국무성이 편찬한 자료집이었다. 국제한민족재단(상임이사장 이창주)의 ‘얄타 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한 뒤 이 옛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얄타 라운드 테이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교수들과 국내 한반도 전문가들이 참여해 한반도 문제를 토론했다.

2월8~14일 얄타 라운드 테이블을 다녀온 뒤 김정남 피살 사건과 사드 배치 강행 등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게이트 파문도 커져갔다. 트럼프가 과연 ‘얄타 2.0 시대’를 열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얄타회담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같은 얄타체제의 ‘희생자’였던 독일은 그 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데, 어째서 한반도는 아직도 그 체제에 치여 허덕이는가. 더구나 독일은 얄타회담의 원인을 제공한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태평양전쟁의 희생국이다. 왜 전범국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독일처럼 분단되어 오늘날까지 그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가. 이런 부조리를 낳은 알타체제란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나? 처칠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올랐다. “우리 회담은 비밀로 해둡시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맘대로 자기들의 운명을 재단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우 불쾌해할 테니 말이오.” 처칠의 말대로 2차 대전 후 세계는 얄타에 모인 세 정상이 그려놓은 운명의 경계선을 따라 작동했다.

얄타회담이 거론되던 1944년 후반기에 이르면 소련군은 이미 서부전선에서 동유럽과 중부유럽을 석권하고 베를린 진입을 앞두고 있었다. 반면 연합군은 1944년 6월에서 7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12월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의 일격을 받은 후 발이 묶여 있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어떻게든 소련군의 참전이 긴요했던 루스벨트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스탈린을 만나야 했다. 독일의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고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을 위해 어떤 선물이 필요한지 거래할 필요가 있었다. 그 거래가 바로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얄타의 리바디아 궁에서 열린 얄타회담이었다.

ⓒAP Photo1945년 2월 얄타회담이 열렸던 리바디아 궁을 관광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얄타체제 대신할 ‘얄타 2.0 시대’ 고민해야

얄타 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하며 사흘을 머문 ‘얄타 인투어리스트’ 호텔은 국제 휴양지에 어울릴 만한 품격을 갖추었다. 하지만 주말을 낀 시점인데도 우리 일행 외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듣던 대로 유럽인들은 아예 눈을 씻고 봐도 볼 수가 없었다. 2014년 3월 크림 사태 이후 유럽연합의 경제제재로 관광객이 급감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얄타 시내의 중심가라 할 수 있는 레닌 광장에도 현지인들만 눈에 띌 뿐 외지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호텔 주변뿐 아니라 시내 곳곳에 짓다 만 건물이 많은 것 역시 제재 이후의 풍경일 터이다. 특히 크림 합병 전 우크라이나 부유층들이 각종 호텔이나 리조트 등 휴양시설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합병 이후 한꺼번에 중단됐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도 성수기인 여름에는 러시아에서 오는 관광객들로 방이 모자랄 지경이라고 한다.

시민들 표정에서 궁색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러시아인 특유의 무표정한 표정이지만 대체로 밝고 친절했다. 현대식 커피메이커를 구비한 간이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팔던 레닌 광장 ‘소냐’들의 모습에서 유럽화된 이들의 삶의 한 면을 볼 수 있었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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