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노동·동일임금은 모두를 위해 필요합니다. 남성과 여성, 동쪽과 서쪽의 임금 차별이 이 나라의 가장 큰 불평등 중 하나입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의 총리 후보 마르틴 슐츠는 2월26일 라이프치히 유세에서 ‘사회정의’를 외치며 지지자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이날 행사는 슐츠가 총리 후보가 된 이후 신연방(옛 동독) 지역에서 연 첫 번째 유세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사민당 출신 마지막 총리인 슈뢰더는 신연방에서 사민당 승리를 이끌며 1998년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현 노동·복지 정책을 수정하려는 슐츠의 계획이 신연방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신연방이 구연방(옛 서독)에 비해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2월20일 슐츠는 빌레펠트 당 행사에서 한 연설과 일간지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실업급여 수령 기간의 연장과 계약직 근로조건 강화 구상 등을 발표했다. 슐츠는 〈빌트〉 인터뷰에서 “50세의 누군가가 15개월 동안 실업급여 I(Arbeitslosengeld I)을 수령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생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정의’를 선거의 중요한 슬로건으로 내세운 슐츠는 이날 노동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수정 의사까지 밝혔다. 이날을 기점으로 ‘어젠다 2010’에 대한 수정이 올해 연방 선거와 독일 사회의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DPA2월26일 독일 사회민주당의 총리 후보 마르틴 슐츠가 라이프치히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어젠다 2010은 사민당 슈뢰더 총리가 2003년 3월에 발표한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개혁 방안이다. 노동시장 유연화, 복지 축소, 일자리 창출 지원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어젠다 2010은 사회국가 시스템에 대한 전면 수정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민당 내부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우파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통과되었다. 더욱이 2005년 1월부터 사회보장과 실업수당을 통합하는 ‘하르츠IV’가 시작되면서 현재의 노동시장 구조가 만들어졌다(박근혜 정부가 일자리 창출의 모범 사례로 자주 인용했던 바로 그 개혁이다). 하지만 실업급여 수령 심사 강화와 수령 기한 단축으로 대표되는 이 정책은 사민당 기존 지지자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또한 2005년 실업률도 12.5%로 급등하며, 그해 선거에서 사민당은 메르켈의 기민·기사당 연합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메르켈 정부는 슈뢰더 정부의 어젠다 2010을 이어받아 지금까지도 긴축재정 기조를 유지하며 독일의 경제부흥을 이끌고 있다.

메르켈 총리뿐 아니라 독일 정부의 긴축재정 기조를 지지하는 많은 인사들과 언론이 슐츠의 행보를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3월1일 독일 연방고용청장인 프랑크위르겐 바이제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기고문에서 “더 많은 분배는 성과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성과물을 받는 사람만을 만든다”라며, 분배보다는 노동에 대한 자극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EPA독일 정부가 복지 축소를 골자로 한 하르츠IV 개혁을 추진하자 시민들이 반대 시위에 나선 모습.
독일의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현상이다. 독일 기업가들과 우파 인사들은 이러한 성공의 가장 큰 요인으로 하르츠 개혁을 꼽는다. 통계수치상 이들의 주장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독일 정부의 2016년 재정흑자는 237억 유로(약 28조3340억원)이다. 1990년 통일 이래 최고 수준이다. 또한 시사 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2016년 말 독일에서는 일자리 104만4000개가 주인을 찾지 못했다. 지난 1월 독일의 실업자 수는 280만명으로 2005년 집계에 비해 200만명이 줄었다. 청년실업 또한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적적녹 연정’의 정권교체 가능성 높아져

하지만 독일 국민들은 각종 통계수치에 가려진 하르츠 개혁의 그림자를 목격하고 있다. 실업급여 수령 기간 연장과 관련한 슐츠의 발언은 하르츠 개혁의 명암에 대한 논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2월 마지막 주 〈슈피겔〉은 ‘양분된 독일’이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통해 어젠다 2010 이후 만들어진 일자리의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기사에 나오는 로크비츠 씨의 사례를 보자. 혼자서 딸을 키우는 그는 13년 전까지 정규직 영업사원이었다. 직장을 잃은 이후, 그는 6년 전부터 주당 30시간을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이 수입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추가로 문구점에서 점원으로 일한다. 그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다. 그에게 휴일은 일요일뿐이다. 통계청의 자료는 주당 20시간 이상만 보장하면 보통의 일자리에 포함했다.

하르츠 개혁 이후 안정적이었던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다. 많은 독일인이 로크비츠 씨 사례처럼 과거에는 없던 일자리 유동성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일을 하고 있다. 수많은 일자리가 새롭게 생겨났지만 대부분 파견제·기간제·시간제이다. ‘미니잡’이라 불리는 저임금 서비스업종이 대량으로 생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자리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독일 경제인구 중 5분의 1이 저소득층의 경계 아래에 위치한다. 지역·업종·성별에 따라 저소득층으로 추락할 위험성도 다르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수평적 불일치’라고 규정한다. 예를 들면 신연방의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39%다. 반면 구연방은 19% 정도다. 미장원과 이발소에서 일하는 사람의 78%가 저임금 노동자다. 숙식 업종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 비율도 비슷하다. 남성 노동자의 15%만이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반면, 여성 노동자는 25%가량이 저임금 노동을 한다. 물론 이러한 저임금 일자리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각이 엇갈린다. 노동계는 이것을 노동 착취로 여기는 반면 정부나 경영계는 노동시장 유연화에 따른 일자리 창출로 본다.

일부 언론은 슐츠와 사민당의 새로운 계획을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와 비교하며 ‘과거로의 회귀’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당장은 이러한 행보가 사민당에 많은 정치적 가능성을 열어준 것으로 보인다. 사회정의에 대한 강조는 사민당을 메르켈 정부와 차별화하고 전통적인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2월4일 독일 공영방송 ARD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5%가 어젠다 2010에 대한 슐츠의 수정 계획을 지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안의 증가와 함께 늘어난 AfD 지지자들의 관심을 ‘민족국가’가 아닌 사민당식 ‘사회국가’로 돌릴 수 있다는 예측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슐츠가 어젠다 2010에 대해 수정 목소리를 내면서, 사민당·좌파당·녹색당 사이 ‘적적녹 연정(R2G)’을 통한 정권교체 가능성도 높아졌다(〈시사IN〉 제492호 ‘메르켈의 독일이냐 좌파 연정 독일이냐’ 기사 참조).

3월6일 사민당은 최고위 회의를 통해 어젠다 2010에 대한 개혁안을 결정하며 슐츠의 선거운동에 힘을 실어줬다. 개혁안에 따르면, 실업자들은 연령과 관계없이 실업 3개월 이후부터 최장 2년간 실업수당을 받으며 재직업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메르켈의 기민·기사당 연합은 마땅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슐츠의 사회정의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기존 질서를 유지하라는 요구도 강한 편이다. 슐츠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선택 폭이 좁아지는 메르켈과 기민·기사당 연합의 고민이 깊어간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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