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22조는 말한다.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문화기본법 제4조는 또 밝힌다.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더불어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4조2항은 이렇게 명시한다.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종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여야 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헌법과 법률과 공무원 복무규정을 어겼다. 예술의 자유를 침해하고 예술가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문화 표현과 활동을 차별했다. 그 반헌법·반법률·반규정적 행위의 중심에 ‘박근혜 사람들’과 국가 공무원들이 있었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해 전직 문화체육관광부 장·차관 등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이런 범법 행위를 기획하고 지시했으며, 그 결과 그들은 지금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블랙리스트를 실제 ‘수행’한 공무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문화행정가 구실을 하고 있다. 특검 조사뿐 아니라 언론 보도, 피해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문체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국립국악원 등 산하 공공기관에서의 검열과 지원 배제 사실이 숱하게 드러났지만 수장을 포함한 어느 공무원도 이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처벌받지 않았다. 2014년 10월 김기춘·김종덕의 지시로 만들어진 ‘건전콘텐츠 TF’에서 팀장을 맡아 블랙리스트 검열을 수행한 송수근 당시 문체부 기획조정실장이 현재 문체부 1차관으로 장관 직무대행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그 일례이다.
 

ⓒ시사IN 신선영2016년 10월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과 예술검열 반대 예술행동 및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과는 했다. 지난 2월23일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관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진실을 국민 여러분께 밝히고, 신속한 재발 방지 대책을 강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누구보다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앞장서야 할 실·국장들부터 통절하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같은 날 문화예술위원회도 “국민과 예술가를 위한 기관으로서 부당한 간섭을 막아냈어야 하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한 기관으로서 힘이 없었고 용기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라는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사과와 동시에 이들은 곧바로 ‘미래’를 이야기했다. 문체부는 문화예술계 자율성을 확립하기 위한 논의 기구를 구성하고, 문화 옴부즈맨 제도를 도입하며, 문화예술 표현이나 활동에 부당한 차별이나 개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게끔 ‘예술가 권익 보장을 위한 법률(가칭)’을 발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화예술위원회도 심사위원 선정 방식 개선, 옴부즈맨 제도 신설, 사업 복원 및 예산 확충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겠다”라고 밝혔다. 문체부는 3월9일 블랙리스트로 배제된 사업을 재추진할 긴급 예산 85억원을 편성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검열했다? 예술가들은 죽어갔다

블랙리스트 피해를 당한 문화계 인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연극연출가 김재엽씨는 “블랙리스트 검열 수행자가 제도 개선자로 나선 꼴이다. ‘셀프 면책’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3월6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2017 연극 발전을 위한 1차 시국토론회’에서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사과하면서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해자들이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2월23일 문체부는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블랙리스트 작성 경위와 피해 현황에 대한 설명은 나중으로 미뤘다. 알맹이 빠진 사과를 예술가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변방연극제〉 전 예술감독 임인자씨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사과문을 보고 ‘분노를 금할 수 없어’ 2월23일 위원회 본관을 찾아 1인 시위를 벌였다. “힘이 없고 용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검열했다고요? 그사이 정말 힘없는 예술가들은 거리에서 죽어갔습니다!”
 

ⓒ연합뉴스2월23일 문화체육관광부 송수근 1차관(왼쪽, 장관 직무대행)과 간부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옛일은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블랙리스트 가해자들에게 예술인들은 “진상 규명부터 하라”며 맞서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2014년 11월 서울연극제 대관 탈락 사태 당시 연극인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문체부는 아르코대극장 등 일부 극장 대관을 허용했다가 공연 전날 갑자기 “구동장치가 고장났다”라며 극장을 폐쇄했다.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당시 이런 결정과 집행을 누가 어떤 과정으로 했는지 밝혀졌나요?”라고 이양구 연극연출가는 3월6일 토론회에서 물었다.

그 외 2014년 ‘세종도서’ 선정 검열, 2015년 창작산실 검열 사태, 2015년 〈다이빙벨〉 상영 외압 사태 등 연극·영화·문학 분야에서 특검 공소장에 기재된 블랙리스트 적용 사례만 해도 수십 개다. 특검은 이런 지시를 내린 이들은 밝혀냈지만 구석구석에서 지시를 받고 수행한 ‘손’까지는 조사하지 못했다. 수사 기한과 인력 한계 때문이다. 피해자는 넘치는데 ‘손’들의 자기 고백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분노하는 지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연극계 현장 예술가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검열백서〉라는 기록물이다. 박근혜 정부 4년간 일어난 블랙리스트 검열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낱낱이 기록해 역사에 남긴다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지난해 말 연극계 인사 50여 명이 참여해 〈검열백서〉 준비위원회를 꾸렸다. 최종 결과물은 내년 초에 나올 예정이다. 준비위원회는 그때까지 네 차례 포럼을 통해 블랙리스트 담론도 꾸준히 유지해나갈 계획을 세워놓았다.

〈검열백서〉는 블랙리스트의 작동 ‘결과’보다 그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그 과정의 핵심은 바로 사람, 즉 블랙리스트 작업을 수행한 ‘손’들이다. 블랙리스트 관련 언론 보도와 특검 공소장은 ‘피해자’ 중심 서술이었지만 〈검열백서〉는 ‘가해자’가 중심인 셈이다. 〈검열백서〉에는 직위 고하에 상관없이, 여러 공무원들의 실명이 그들의 행위와 함께 실릴 예정이다. 김재엽 〈검열백서〉 준비위원회 사무국장은 “물론 발간 전, 그 공무원들에게 일일이 내용을 보내고 공식 해명을 요청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이랬던 사실이 있습니까? (그랬다면) 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까?”를 묻고 그 답 역시 〈검열백서〉에 기록될 것이다. 이런 기록이 있어야 기억하고, 기억해야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