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스 루프(Lippes loop)라는 게 있다. 간단하게 ‘루프’라고 하면 더 잘 알 듯하다. 자궁에 끼우는 피임장치인데, 이것이 세계 최초로 임상시술된 곳이 한국 여성의 자궁이다. 그때가 1963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라는 가족계획 구호가 풍미하던 시절이라 보건소에서 무료로 시술해줬다.
임상시험 결과의 승인도 받기 전인 이듬해, 보건사회부 장관은 부작용을 염려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루프 시술의 목표를 30만 건으로 올리라고 지시한다. 당시 수급 가능한 루프의 분량은 미국에서 지원해준 2만 건. ‘까라면 까는’ 군사주의는 군대에서만 통용되는 게 아니었다. 나머지 분량을 채우기 위해 루프의 국내 생산이 급조된다. 시술 목표를 채우기 위해 가임기 여성을 모집해 병원으로 인솔하고, 나중에는 의사가 부족하자 조산원이 시술을 담당한다.
부작용은 불을 보듯 뻔한 것. 루프를 낀 뒤 심한 출혈이 생기는 것은 다반사였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유산과 사망까지도 생겨났다’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1966년 경제기획원 장관은 시술 목표를 또다시 100만 건으로 올리라고 지시한다. 예산 덕에 결과적으로 40만 건이 됐지만 이 과정에서 여성 몸의 안전이나 자기결정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실적만이 지상 과제. 여성의 몸과 자궁은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며 “잘살아보세”라는 경제개발을 위한 인구 억제의 도구에 불과했다. 한국의 가족계획 사업은 근대화의 한 과정이었지만 근대의 특징인 개인적 주체나 자율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위의 사실은 배은경 서울대 교수가 쓴 〈현대 한국의 인간 재생산〉의 내용이다. 이를 소개한 것은 최근 정부가 저지른 일련의 ‘사고’에서 느껴지는 기시감 때문이다. 지난해 말 행정자치부의 ‘대한민국 출산지도’나,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여성의 고학력·고스펙이 저출산 원인’이라는 황당한 연구 결과에는 1960~1970년대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을 관통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에다, 여성을 애 낳는 기계쯤으로 보면서, 출산이라는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자율적인 영역에 국가가 적극 개입하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때와 지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요즘 여성은 국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한 페미니즘 단체 회원들은 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대해 “정부야, 네가 아무리 나대봐라, 내가 결혼하나. 고양이랑 살지”라고 조롱했다. 그 저항의 결과가 통계수치로 표현됐다. 2016년 합계출산율 1.17명이다. 지난 10년간 80조원이라는 예산을 쏟아부은 결과이니 정부도 자인했듯 한마디로 실패다.
출산은 정부가 목표를 정하고 기계로 찍어내듯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선은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돌봄이 사회의 중심 가치이자 원리로 작동할 수 있도록 사회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출산율 제고를 위한 여러 정책은 궁극에는 돌봄 사회로 재편되는 방향으로 나침반을 재조정해야 한다.
“정부야 네가 아무리 나대봐라, 내가 결혼하나… 고양이랑 살지”
현재의 임노동은 도우미든 아니면 할머니든 누군가의 돌봄 노동 지원을 전제로 한다. 여성이 일터에서 일하며 돌봄 노동까지 이중 노동을 감당한다 해도 남자를 기준으로 한 장시간 노동 모델을 벗어날 수가 없다. 결과는? 죽자 살자 하다 나가떨어지거나, 아이에게 고통이 전가되거나 둘 중 하나다. 가뭄에 콩 나듯 겨우 ‘성공’한 경우라면 그 뒤에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뒷바라지한 친정어머니 등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
반면 돌봄 사회는 돌봄이 권리이며 동시에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노동이 되는 세상이다. 돌봄이 더 이상 개별 가정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이는 질 좋은 보육시설을 더 짓자는 말이 아니다. 맞벌이 부부는 ‘맞돌봄’을 하고, 비혼 남녀도, 한부모 가족도,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가능한 만큼 돌봄을 경험하며 보살핌의 기쁨과 보람·위안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여러 정책이 통합 시행되어야 하겠지만,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며 평등하고 온전한 삶을 꾸릴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이 급선무다.
비현실적인 얘기라 할지 모르지만 종종 다음과 같은 꿈을 꾼다. 하루 24시간을 쪼개 6시간 일하고, 6~8시간 잠자고, 6시간은 돌봄 노동에, 나머지 4~6시간은 자신과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데 오롯이 투여하는 것이다. 꿈도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고 했다. 혁명적 대안은 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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