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탄핵 촛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때에, 정치권의 토굴 한구석에서는 개헌 군불을 때느라 분주하다. 주로 제3지대에 모여 있는 정객들은 박근혜의 국정 농단이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기 쉬운 대통령중심제 탓이라면서, 이번 기회에 내각책임제로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헌법학 교수 김욱과 작가 고종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헌을 옹호하는 책을 출간했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헌법의 상상력〉(사계절, 2017)을 펴낸 역사 평론가 심용환은 개헌 논의에 신중하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헌헌법(헌법 제1호)이 제정된 이래로 다섯 번의 일부 개정과 네 번의 전면 개정을 했다. 이 상황은 1948년에 태어난 한국인이라면 헌법이 아홉 번 바뀐 나라에서 살아온 셈이라고 말해준다. 또 이 상황은, 사람은 두 번 태어날 수 없지만 바뀐 헌법 아래서는 아홉 번이나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헌법은 우리 일상과 밀접하며, 그 헌법의 규정을 받는 국민 삶을 결정한다.

1948년 7월17일 공표된 제헌헌법 제1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고,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두 조항은 아홉 차례의 헌법 개정 중에 글자 토씨 하나 바뀜 없이 이어져 내려왔는데, 박정희가 1972년 12월에 불법 개정한 유신헌법(헌법 제8호)에 단 한 번 예외가 있었다. 그는 감히 제1조를 건드리지 못한 대신, 제2조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라고 변개했다.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라는 말은 얼핏 지당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어마어마한 꼼수가 있다. 첫 번째는 ‘국민=주권자’가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주권자’라는 헌법상의 정당성을 확보해두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국회나 정당을 제쳐두고 국민과 직접 거래(국민투표)하는 것을 독재자가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었다.

ⓒ이지영 그림
이영록의 〈우리 헌법의 탄생-헌법으로 본 대한민국 건국사〉(서해문집, 2006)가 자세히 밝히고 있듯, 제헌헌법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지 않았다. 제헌헌법은 다섯 차례 수정 끝에 공포(公布)된 1944년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헌법)의 구조와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제헌헌법 이래로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제1장 제1조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이라는 임시헌장의 간명하기 그지없는 조항을 군말 없이 계승한 것이고, 제헌헌법은 내용적으로도 임시정부 헌장기초위원이었던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반영된 임시헌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대한민국 헌법만의 특징은 구체적인 총강과 조항 앞에 헌법 전체의 의미를 압축하여 설명하는 전문(前文)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 전문의 효력 유무를 두고 학문적 논란이 있지만, 대한민국의 정체성 혹은 정통성을 서술한다는 뜻에서 전문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이 전문 역시 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을 충실히 따른다. 제정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강도 일본에 패망한 나라가 3·1 대혁명에 이르러 대한민국으로 건립되었다’는 임시헌장의 정신을 승계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파들은 대한민국이 1945년이나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부르대지만, 제헌헌법 초안에는 없었던 저 구절을 전문에 넣어야 한다고 했던 이가 이승만이다.

역사는 이승만이 헌정사에 남긴 가장 큰 흔적을 내각책임제였던 초안을 대통령중심제로 바꿔놓은 것을 꼽으면서, 내각책임제라면 방지할 수 있었던 독재를 대통령중심제이기 때문에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정치체제 아래서든 헌정 질서를 폭력과 예외(비상조치)를 통해 파괴하고자 드는 독재자 앞에서 배겨날 제도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군인과 계엄령 선포를 통해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헌법을 사유화했다. 여기에 박정희의 쿠데타 수법을 따라잡았던 전두환까지 더하면, 현재 시청 앞에서 성조기 집회를 하고 있는 탄핵 반대 집단이 ‘계엄령이 답이다’ ‘군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외치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헌법을 만드는 주체는 국민이어야”

헌법은 크게 두 가지 조항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정치체제에 대한 조항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 기본권에 대한 조항이다. 전자는 권력을 확보하거나 분점하는 것이 목표인 정치인들의 관심사이고, 후자는 헌법을 통해 자유·평등·노동·복지를 보장받고 확대해야 하는 국민의 관심사다. 그런데 70년간의 한국 정치사를 보면 국민 기본권이 중요 의제가 되어 개헌이 논의된 적이 전무했다.

여태까지 내각책임제나 이원집정부제 등의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정권을 창출할 수 없거나, 정치적 궁지에 몰린 쪽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에 무릎을 꿇은 민정당이 제안한 의원내각제 개헌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 제의를 물리친 이유는 두 사람의 승리가 목전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부터 오늘까지, 개헌과 호헌 논의는 권력을 둘러싼 정치인들의 전략적 지렛대로 동원되었다. 국민의당이 지난 2월17일 ‘6년 단임 분권형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자체 헌법개정안을 발표했다지만, 촛불의 힘으로 개헌의 군불을 때는 이들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뻔하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우리는 계속 헌법을 만들어가야” 하지만, “헌법을 만드는 주체는 바로 국민”이어야 한다. 아쉽게도 1987년에 우리는 그 기회를 놓쳤다.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 지음
사계절 펴냄
〈헌법의 상상력〉은 한국인 누구나가 알아야 할 유일무이한 교양은 오로지 헌법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이 책을 사면 딸려오는 173쪽짜리 별권 부록은 제헌헌법(제1호)부터 1987년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제10호)까지 모두 수록해놓았는데, 각 헌법의 맨 앞자리에 놓인 전문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그 헌법을 만든 정권과 시대의 정체(政體)와 지향을 음미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과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없는 것이 아쉬운데, 한국에서 북한 헌법을 열람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김정은 개새끼’라고 욕하는 것보다 남한과 북한의 헌법을 나란히 비교하게 해주는 일이 대한민국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고단수일 텐데도, 우리 정부는 왜 이렇게 체제 선전을 못하는 것일까?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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