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의팔 제공8월31일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식구와 수목원을 찾은 나실 씨(오른쪽 두 번째).
“나실 씨, 치료 끝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돈 벌고 싶어요. 그런데 일할 수 없어요. 손가락도 안 돼요. 앉아 있는 것도 안 돼요. 집에 가야죠.”

올해 안에 고국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예정인 나실(29)이 우리 센터 산재쉼터에 머무른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는 화재로 산재를 당한 뒤 우리 쉼터에 머무르며 한 가족처럼 살았다. 이곳에서 많은 방글라데시 친구를 만나면서 얼굴이 한결 밝아진 그는, 쉼터 관리자였던 티투가 해외 연수차 필리핀으로 떠난 공백을 잘 메워주었다. 그가 쉼터에 새로 들어오는 다른 나라 이주노동자에게 따뜻하게 안내자 구실을 할 수 있는 건 그 자신이 산재로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서로 피부색이 다르고 말도 잘 통하지 않지만, 그는 밝은 표정과 손짓 발짓으로 이주노동자 동료와 소통한다.

나실이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온 건 2004년 7월7일이었다. 그 뒤로 그의 삶은 고되고 불안정한 노동의 연속이었다. “저는 사람을 잘못 만났어요. 어떤 사장님 돈 주지만, 어떤 사장님 돈 안 줘요. 어떻게 한곳에서 오래 일해요?” 나실은 임금을 꼬박꼬박 주는 ‘사장님’을 찾아 수없이 직장을 옮겼다. 이러다 과연 무사히 돈을 벌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커져갔다. 그의 불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2006년 1월3일, 나실은 파주에 있는 제조공장에서 일하다 화재 사고를 당했다. 공장 한쪽에 있던 난로에 시너가 떨어져 불이 번진 것이다. 그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나실은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로 파주의 한 병원에 이송됐다. 화상은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있는 화상 전문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돈이 없던 그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다 한 달이 지나서야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나실이 가장 충격을 받은 건 회사 사장의 ‘무관심’이었다. 처음 사고가 난 뒤 4개월 동안 나실은 온몸에 붕대를 친친 감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붕대를 푼 뒤에도 3개월을 더 치료해야 했다. 수술은 총 6~7차례나 이루어졌으나 이제 더 이상 이식할 피부도 없다. 지금도 이식한 피부가 당겨서 제대로 앉을 수 없고, 손가락을 펼 수도 없다. 그렇게 병원을 전전하고, 치료받는 동안 회사 사장은 한 번도 나실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화상을 당한 건 작업장 안전에 무감각한 고용주 때문이다.

이주노동자 산업재해 발생률 매년 증가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발생률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발간되는 다국어 뉴스레터 〈Migrant OK〉 8월호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는 같은 기간 한국 노동자 전체의 산업재해 발생이 감소한 것과 달리 점점 늘었다. 2007년 기준으로 노동자 100명당 산업재해자 수를 뜻하는 ‘재해율’은 한국 노동자가 0.72명인 데 반해 이주노동자의 경우 1.01명으로 나타났다.  

다행히 산재보험 처리가 된다 해도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산재보험만으로 처리되지 않는 수술비 일부와 고가의 약값은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가야 한다. 후유증도 심각하다. 나실의 경우 비만 오면 온몸이 아파 진통제로 고통을 달랜다. 진통제를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위장을 다 버린 것은 물론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 약효도  떨어졌다. 마음의 상처도 크다. 나실은 화상으로 일그러진 손을 감추기 위해 한여름에도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다닌다. 그가 가죽장갑을 벗는 날, 그의 마음에 새겨진 아픈 상처가 조금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명 최정의팔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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