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송이·도민준·덕선이·정봉이는 아직 어린 강아지다. 그에 비해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의 주인공 이름을 딴 견우는 이제 노령견이다. 누군가는 강아지 이름을 ‘야옹’으로 짓고, 고양이 이름을 ‘멍멍’으로 짓기도 한다. 차트 위에 적힌 ‘김재규’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보고 흠칫 놀란 적도 있었다. 정치적인 의미를 담은 줄 알았더니 서울 노량진에 위치한 ‘김재규 경찰학원’ 근처에서 구조해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각기 다른 이름이 갖가지 사연을 안고 매일 병원 문턱을 드나든다.

여느 병원이 그렇듯 동물병원 역시 희로애락의 최선전이다. 생명을 다루는 공간에서 의학과 철학의 거리는 멀 수가 없다. 현직 수의사가 쓴 〈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문학과지성사)라는 책 제목이 눈길을 끈 까닭이다. 저자인 이원영 우리아이동물병원 원장은 어느 날 집 안으로 들어온 강아지 ‘복돌이’를 통해 삶이 바뀐 사람이다.

당시 그는 동양철학을 전공한 석사생이었고, 뒤늦게 장교로 입대한 군인이자 기혼자였다. 아내가 강아지를 기르고 싶다고 했을 때 별 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어릴 적 동네마다 볼 수 있었던 메리·쫑·누렁이와 다를 게 뭐 있겠나 싶었다. 제대 후 유학을 준비하던 때는 외환위기의 직격탄이 지나간 직후였다. 유학을 못 갈 바에야 아예 다른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즐겁고, 보람 있고, 조용한 일. 그때 복돌이가 눈에 들어왔다. 복돌이에게 악성종양이 생겨 8개월 넘게 매주 동물병원을 오가는 동안 이씨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고민했다. 이씨는 그렇게 다시 학부생이 되었다.

ⓒ시사IN 신선영〈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의 저자 이원영씨는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것은 철학적 사고를 하는 데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라고 말했다.

늦깎이 대학생이 선택한 새로운 전공은 수의학이었다. 철학이 스스로 선택한 첫 번째 세상이었다면, 수의학은 복돌이가 열어준 두 번째 세상이었다. 수의대에서 보낸 6년은 강렬한 경험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겸손과 겸허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내가 하는 건 ‘요만큼’, 아주 작은데 결과가 굉장히 드라마틱할 때가 있다. 좋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생명이 살아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면 분명히 낫겠지’ 하고 덤볐다가 죽는 경우도 있다. 뭘 못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걸 다 했는데도. 생명 앞에서 겸허해진다는 게 실제 상황이 된다.”

감기약 그렇게 함부로 먹이시면 안 돼요

흐르는 시간은 삶의 편이라기보다 죽음의 편이다. ‘생’과 ‘몰’의 거리는 인간보다 반려동물에게 더 가깝다. 이씨가 책에서 안락사 관련 부분을 가장 공들여 쓴 이유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안락사 문의를 받곤 한다. 늙은 반려동물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보호자는 탈진해 있고, 그에게는 마취제와 심정지 약물이 있다. 모든 안락사 요청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수의학적 지식에 근거해 호전 가망성이 전혀 없고, 갈수록 고통이 가중되며, 보호자의 온 가족이 동의해야 하고 자신 외 다른 수의사의 판단도 동일해야 한다. 이 모든 조건 중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시행하지 않는다. 거절보다 어려운 건 시행이다.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보호자 앞에서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편인 이씨도, 반려동물의 죽음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질문과 실천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씨는 “근원적 차원까지 고민하면서도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자세를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것은 철학적 사고를 하는 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라고 말했다. 좋은 사료와 잠자리를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반려동물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싫든 좋든 가족관계가 장기전이듯, 반려동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수의사로 사는 일은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긴 했지만 ‘조용한 일’은 아니었다.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녹음기를 틀어줄 수도 없고 난감했다(웃음).” 보호자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받는 질문과 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상황에 대해 안내문 같은 걸 만들어볼까 싶어서 지난 2년간 끄적여뒀던 메모와 에피소드들이 책의 바탕이 됐다.

복돌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숨진)’ 뒤에도 여전히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절대 안 돼요!” 같은 말을 잘 못하는 수의사이기도 하다. 간식을 먹이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는 왜 보호자들이 반려동물에게 간식을 먹일 수밖에 없는지를 헤아린다. 때로 간식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도 늘 완벽하게 균형 잡힌 최적의 식사를 평생 하고 사는 건 아니니까. 이씨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방법은 무조건 옳은 것도, 무조건 그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동물의 권리를 먼저 자각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충돌 과정에서 더 많은 논의와 합의가 이뤄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이씨는 현행 동물법 중 두 가지는 꼭 정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반려동물에 대한 ‘자가치료’ 문제다. 보호자가 자신이 키우는 동물을 직접 치료해도 위법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먹는 감기약을 반려동물에게 먹인다거나, 백신을 집에서 접종하는 일도 흔히 벌어진다. 대부분은 엉뚱한 데 주사해 종괴나 농양을 만들어 결국 병원을 찾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비용도 2~3배 더 든다. 심지어 중성화를 시킨다며 고환을 끈으로 묶어 괴사된 상태로 병원에 온 반려견도 있었다. 보호자가 동물학대범이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다. ‘옛날에는 다 그렇게 했는데’ ‘그래도 되는 줄 알았는데’ 같은 말 앞에서 아연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입양 과정 법제화다. 강아지·고양이 ‘공장’이라 불리는 번식장은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 마구잡이 번식은 치명적 유전 질환을 계속 퍼뜨린다. 혈우병이나 슬개골 탈구, 잠복고환 등 질환을 가진 동물들이 통제되지 않은 채 분양되고, 이는 최종적으로 보호자의 부담이 된다. 이렇게 유통되는 동물은 대개 2개월도 되기 전에 어미 품을 떠난다.

일본과 독일은 자견과 자묘가 충분한 수유 기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돼 있고 수의사를 통해 통제된다. 독일은 아예 반려동물의 매매가 금지돼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씨는 “외국의 방식을 전적으로 적용하는 건 무리일 수 있지만, 입양 단계에서부터 반려동물을 보호하는 제도적 차원의 개선은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7월 기준으로 반려동물 돌봄 인구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그만큼 병원을 찾는 보호자와 반려동물의 상황과 상태도 굉장히 다양하다. 왕따로 인해 가출한 중학생이 유기견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유기묘를 건사하다가 건물주로부터 쫓겨날 위기에 처한 중년 남성이 찾아오기도 한다. ‘동물과 나’의 친화나 관계 양상도 다양하고, 그에 따라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는 치료의 범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수의사로서 이씨는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혼내려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고치려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렇게 동물을 고치는 일은 때로 사람의 일상을 돌보는 일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반려인간’으로 동물들에게 더 위로받고 사는지도 모른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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