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나라 빚’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직전의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 모으기 운동’이다. 나라 빚 증가는 곧 국가의 위기로 직결되었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가채무(나라 빚)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중이라고 한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정부 및 공공기관이 발행한 채권 잔액(나라가 직간접으로 빌리고 아직 청산하지 않은 돈)이 처음으로 900조원을 넘었다. 10여 년 전인 2006년의 366조원과 비교하면 2.5배쯤 늘어난 규모다. 경기침체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국가채무까지 급증하고 있다니 시민들로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회심리를 배경으로 정부와 일부 국회의원들은 국가채무를 늘리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각종 재정건전화 법안을 발의해둔 상태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10월 초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재정건전화법을 제안했다. 첫째, 국가의 순(純)재정 상황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상의 적자가 연간 GDP의 3%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 연간 재정적자가 여러 해를 거치며 쌓인 것이 국가채무다. 이런 국가채무 역시 GDP의 45%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관리한다. 둘째, 정부나 국회 등이 국가 예산을 추가로 소요하는 법안을 내면, 기존 국가사업을 축소·폐지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반드시 첨부해야 한다(이른바 ‘페이고(pay-go) 원칙’). 새로운 정부 지출만큼 기존 지출을 깎아, 총지출을 현재 수준에서 묶겠다는 이야기다. 셋째, 5년 주기로 ‘사회보험 재정건전화’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사회보험의 수입과 지출 상황을 강력히 통제하겠다는 소리인데, 예컨대 연금급여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정부 지출의 증가를 막아서 그동안 기획재정부의 조세-재정 기조(‘감세와 작은 정부’ ‘복지 억제 및 축소’)를 제도화·영속화하려는 의도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연합뉴스지난해 4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2016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가운데)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가채무 공방의 숨은 1인치

이토록 강력한 정책이 필요할 정도로 한국은 국가채무가 많은 상태인가? 특히 노무현 정부 이후 국가채무를 둘러싸고 치열한 정치 공방이 전개되어왔다. 당시 보수 진영은, 정부가 국가채무를 축소 발표해서 국민을 현혹한다고 공격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신뢰와 지지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노무현 정부가 발표한 국가채무 규모는 대체로 국제통화기금(IMF) 기준에 의거한 것이었다. 정부가 원금 및 이자의 상환 의무를 직접 부담해야 하는 ‘확정채무’를 중심으로 국가채무를 산정한 것이다. 정부 부처인 기획재정부가 원금과 이자, 상환 일자를 명시한 국채를 매각해서 돈을 빌리는(원금과 이자를 명시한 국채를 발행·매각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당시 보수 진영은 확정채무 이외에도 공기업 부채, ‘정부보증 채무’ ‘4대 연금의 잠재부채’ 등을 모두 국가채무에 포함시켜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계산하면 ‘나라 빚’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인데, 노무현 정부가 정권 안위 차원에서 국가적 위기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수 진영이 국가채무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항목 가운데 정부보증 채무는, 중소기업이나 서민층에 대한 정책금융을 의미한다. 금융기관이 정부의 보증을 받아 해당 개인 및 기업에 대출하는데, 채무자들이 빚을 상환하지 못하는 경우 정부가 대신 갚아야 한다. 한편 연금공단들은 미래의 어느 순간 연금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에 대비해서 일정한 규모의 자금을 ‘책임준비금’으로 쌓아두어야 한다. 그만큼의 돈을 책임준비금으로 축적해놓지 않았다면 그 차액(적립해야 할 책임준비금이 100조원인데 이 항목으로 적립해둔 돈이 40조원이라면, 차액은 60조원)을 ‘연금의 잠재부채’라고 부른다.

 

 

 

ⓒ연합뉴스이명박 정부는 ‘감세와 작은 정부’ ‘재정건전성 유지’라는 보수적 기조로 조세 및 재정정책을 설계했다.

 

공기업의 부채 가운데 일부를 국가채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은 나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정부보증 채무, 연금의 잠재부채 등까지 국가채무에 포함시키라는 보수 진영의 주장엔 정치적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당시 국제 기준으로 봐도 정부보증 채무, 연금의 잠재부채 등은 국가채무로 잡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05년 기준 OECD 국가들의 총부채 수준을 보면(아래 〈표 1〉 참조),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국제적으로 매우 우량한 편에 속한다. ‘GDP 대비 국가 총부채’ 비율의 경우, 일본 169.5%, 미국 67.4%, OECD 평균 77.9%인 반면 한국은 25.6%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 진영은 노무현 정부가 시행한 ‘종합부동산세’까지 빌미로 삼아 공격을 이어나갔다. 노무현 정부는 대폭 증세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살리지 못한 데다 과다한 복지로 나라를 빚더미에 올린 무능한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썼다. 이런 부정적인 평판이 확대되면서 결국 정권 재창출에도 실패하게 되었다.

이후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감세와 작은 정부’ ‘재정건전성 유지’라는 전형적인 보수적 기조로 조세 및 재정정책을 설계했다. 박근혜 정부도 대체로 그렇게 했다. 이명박·박근혜 시대에, 야권이 ‘국가채무 급증’ 카드를 꺼내들어 정부를 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감세정책 때문에 재정적자와 국가채무가 급증했다는 논리다. 이렇게 되어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국가채무에 관한 한 비슷한 견해를 공유하게 되어버렸다.

 

 

 

재정건전성은 OECD 최고 수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한국의 국가채무 규모는 결코 문제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보수 정부들은 노무현 정부 당시 반영되지 않았던 항목까지 합쳐서 국가채무 규모를 발표했다. 2012년에는 기존 국가채무 개념에 비영리 공공기관의 채무까지 포함한 ‘일반정부 부채’를 최초로 공표했다. 2014년에는 비금융 공기업까지 포괄한 ‘공공부문 부채’를 발표했다. 둘 다 국가채무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채무를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그 규모가 수백조원 단위로 달라진다. 예컨대 2014년 일반정부 부채는 620조6000억원으로 GDP의 41.8%다. 같은 해 공공부문 부채는 957조3000억원으로 GDP의 64.5%다. ‘빚 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OECD의 평가는 전혀 다르다. 2014년 OECD 통계(41쪽 〈표 1〉 참조)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GDP 대비 순부채(총부채-총자산)’는 150.1%에 달한다. 일본 정부의 순부채가 이 나라 GDP의 1.5배에 달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도 각각 91.2%, 81.5%에 달한다. OECD 평균은 74.1%다. 그렇다면 빚 때문에 망국의 비운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한국은 어떠한가? 마이너스 35.9%다. 한국 정부의 자산이 부채보다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OECD에서 가장 우량한 재정 상태다.

보수 정부가 채택한 국가채무 기준인 ‘공공부문 부채’로 보면,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꽤 높아 보인다. 그런데 순부채 비율이 오히려 마이너스(‘부채보다 자산이 많다’는 의미)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 지출의 상당 부분이 융자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예컨대 저소득층의 주거 마련을 위해 해당 계층에게 대출(융자)하는 방법을 사용해왔다. 예컨대 정부가 저소득층 주택자금을 조달하려면 국채 매각 등의 수단으로 돈을 빌리므로 이 과정에서 국가부채가 증가한다. 그러나 부채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이후 받을 수입도 발생한다. 그 돈을 저소득층에게 융자해준 것이므로 대출금을 상환받기 때문이다. 시중금리보다는 낮지만 이자까지 붙여서 돌려받는다. 국가채무가 엄청나게 많아 보이지만, 순부채는 오히려 마이너스인 이유다.

 

 

 

 

 

ⓒ연합뉴스2006년 12월 국세청 청사 앞에서 보수 시민단체가 종합부동산세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정부가 국채 매각으로 1000억원을 빌려서 저소득층 주택자금으로 융자해줬다고 치자. 이 경우, 재무제표상으로는 정부가 1000억원을 지출했고, 따라서 국가채무 역시 1000억원 늘어난 것으로 산정된다. 원금과 이자를 상환받는데도 말이다. 저소득층의 혜택도 대출금 전액(1000억원)이 아니라, 시중금리보다 낮은 정책금리로 인한 이자비용 절감 정도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대출금 전액을 예산 지출로 잡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정부 지출은 다른 OECD 국가들보다 매우 적은 편인데, 그 공식적 정부 지출 규모마저 ‘뻥튀기’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2011년 기준 OECD의 평균 재정지출 규모는 GDP 대비 43.3%인데 한국은 32.3%에 불과하다. 그만큼 복지 지출이 적다.

한국은 이미 다른 국가보다 현저히 ‘작은 정부’를 갖고 있다. 저부담·저복지 국가다. 그런데도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초기에 발표한 ‘2013~2017년 국가 재정운용’ 방향에서 관리재정수지의 적자 규모를 점차 줄여 2017년에는 균형재정(정부 수입=정부 지출)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를 위해 균형재정에 이를 때까지 총지출 증가율을 총수입 증가율보다 지속적으로 2~3%포인트 이상 낮게 유지했다. 2014년과 2015년 예산안을 보면, 재정지출 증가율이 명목 경제성장률을 밑돌 만큼 재정을 긴축적으로 운영했다. 현대경제연구원(2015)에 따르면, 한국의 재정정책은 세계 금융위기 와중인 2008~2009년에는 확장적이었지만, 이후 줄곧 긴축적이거나 균형적 기조를 고수해왔다.

저부담·저복지에서 중부담·중복지 국가로

그러나 실적은 좋지 않다. 2013년과 2014년에는 연속으로 각각 8조5000억원, 11조1000억원 규모의 세수 결손을 겪었을 정도다. 이는 결국 긴축적 재정 운용이 경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대대적 감세로 조세부담률이 매우 낮아진 가운데 그 수준에서 정부 지출을 관리하려다 보니 재정정책을 긴축적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간 수요가 침체된 상황에서 정부마저 돈을 쓰지 않으니 경기가 침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경기가 바닥을 기니까 세수가 줄어들면서 재정건전성이 악화된 경우다.

 

 

 

 

 

왼쪽 〈표 2〉를 보면, 한국 정부가 G20의 다른 국가에 비해 얼마나 긴축적으로 재정을 운영했는지 알 수 있다. 표에 등장하는 ‘구조적 재정수지’는, 해당 정부가 경기활성화를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재정정책을 펼쳤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G20 소속 국가들의 경우(2012년), GDP 대비 ‘구조적 재정수지’가 선진국 평균은 마이너스 5.1%, 심지어 신흥국 평균도 마이너스 2.2%다. 그만큼 정부 지출을 확대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은 2.3%에 달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발생 이후 대다수의 G20 국가들이 적자재정을 편성하면서 경기부양에 나섰지만, 한국은 독야청청 흑자재정을 고수해왔던 것이다.

물론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주장을 원용하면, 감세 역시 일종의 ‘확장적 재정정책’이다. 어떤 감세인지가 중요하다. 경기를 살리려면, 감세로 소비나 투자를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나 그런 효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에서는 고소득층과 대기업을 위한 감세로는 경기를 호전시키기 어렵다. 오히려 돈이 과도하게 남아도는 계층으로부터 증세한 돈을 소비·투자 성향이 높은 계층에게 정부 지출 형태로 배분하는 방법의 효과가 훨씬 클 수 있다.

 

 

 

 

ⓒ연합뉴스2015년 4월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정부의 복지 재정 절감 계획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는 와중에 양극화까지 심화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조세 및 재정정책 기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통화정책의 무력화가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저성장·양극화의 수렁에서 한국 경제를 건져낼 수 있는 유력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적극적인 재정정책이다. 저부담·저복지에서 중부담·중복지 국가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지를 확대하되 증세를 동반하면 중장기적으로 균형재정을 이뤄낼 수 있다.

한편 경기침체로 세수가 떨어지고, 이로 인한 재정 상태 악화로 정부 지출을 줄인 끝에 경기가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대비해야 한다. 경제가 일단 악순환에 빠지게 되면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정부 지출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결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 국가채무 급증은 다음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기획재정부가 법률적 차원에서 정부 지출 증가를 차단하기 위해 추진 중인 재정건전화법은 저지해야 한다.

 

기자명 정세은 (충남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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