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제도권 진보와 보수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양측이 모두 공감하는 ‘공리(公理)’ 하나가 자연스럽게 성립되었다. ‘국가부채는 나쁘다!’ 국가부채(대표적 지표로는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상승은, 야권이 정부를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정권 교체에 따라 야당으로 전락한 이전의 여권도 똑같은 논리로 공격한다. 심지어 복지 확대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국가부채 증가를 비난하는 이율배반적인 경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집권 세력은 재정확대 정책을 꺼리게 된다. 돈을 빌려야 하기(국가부채를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부채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불길하다. 개인이 큰 빚을 지면 빈곤해지게 마련이다. 파산하기도 한다. 개인(가계)의 과다한 빚은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비윤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부채를 개인의 빚에 견주어 평가해도 되는 것일까?

국가부채란, 정부가 주로 자국의 민간 부문으로부터 빌린 돈이다(해외에서 빌린 돈의 비중은 크지 않다). 정부 지출이 절실한 시기는 불경기다. 세수가 줄어든다. 그러나 빈곤층 증가로 인해 복지 수요는 오히려 증가한다. 결국 빌려서 지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부채가 확대된다. 국가는 빚이 많다는 것만으로 더 가난해지지는 않는다. 개인은 빚을 ‘남’으로부터 빌리기 때문에 파산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국가부채는 국가(국민)가 국가 자신(국민 자신)으로부터 빌린 돈이기 때문에 파산의 위험이 적다. 극단적인 경우, 국가의 권능으로 화폐를 더 발행해서 갚아버리면 그만이다. 일각에서 국가부채가 늘어나면 “후대의 상환 부담이 커진다”라고 한다. “후대의 부를 가로챈다”라고도 한다. 국가경제 전체로 보면, 채무자 ‘철수’가 진 빚은 채권자 ‘영희’의 자산(철수에게 빌려주고 원금 및 이자를 받는)이다. 엄밀히 말하면, 후대에도 채권자와 채무자가 각각 존재하고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후대 전체가 지금의 국가부채를 떠안는 것이 아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 시립대학 교수는 개인 빚과 국가 빚 사이의 차이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권고해왔다.
 

ⓒAP Photo2011년 6월21일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 시민들이 정부의 재정긴축 정책에 항의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부채와 재정확대 정책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어왔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8년여가 흐르는 동안 윤곽이 잡힌 논점이 있다면, 개인 빚과 국가 빚에는 각각 다른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이라면 일단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부채를 최소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른바 ‘긴축’이다. 그러나 불황기에 국가가 빚을 줄이려고 긴축(정부 지출 삭감)을 하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국가 차원에서는, ‘철수’의 소비가 ‘영희’의 수입이다. 모든 시민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면 모두가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경제성장이 지체되면, 세수가 줄고 국가부채는 폭증한다. 2010년 재정위기 이후 강도 높은 재정긴축을 강요당해온 그리스가 대표적 사례다. 경제성장률이 지속적으로 지체되고 실업률은 여전히 유럽연합(EU) 중 최고 수준이다. 국가부채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월7일 내놓은 그리스 관련 보고서에서 “그리스의 채무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결국 폭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정정책은 왜 금기가 되었나

그리스 경제를 사실상 신탁통치하고 있는 ‘유럽중앙은행-IMF-EU집행위원회’ 트로이카는 재정위기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재정긴축을 대안으로 고수해왔다. 폴 크루그먼 교수,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 리처드 쿠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연구원 등 저명한 지식인들이 그리스의 재정 확장을 권유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글로벌 정부들과 경제 관료, 학계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재정확대 정책’이 금기였기 때문이다.
 

ⓒAP Photo2008년 11월15일 ‘G20 금융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며 재정확대 정책이 재평가받았다.

어느 나라에서든 경제학 기초 과정에서는 ‘광의의 정부(중앙은행 포함)’가 경기를 조절하는 양대 수단으로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거론한다. 실제로 재정정책은 193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대공황과 불황을 극복하면서 사상 초유의 장기 호황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접어들어 레이건(미국)과 대처(영국)가 집권하면서 재정확대 정책은 급격한 위상 추락을 경험했다. 초국적 금융기관 골드만삭스의 경영이사인 앵겔 유비드가 영국의 대표적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정책 포털(VOX)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경기순환은 통화정책만으로 조절할 수 있다. 재정정책으로는 국가부채나 관리하면 된다’라는 사고방식이 도그마로 굳혀진” 상황이다.

시장근본주의 보수파들이 재정정책을 혐오하는 근본적 이유는, ‘큰 정부’를 반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가 특정 산업 부문이나 계층에 복지 지출, 인프라 건설 등의 수단으로 자금을 투입하는 재정확대 정책은 엄연히 ‘정부의 시장 개입(큰 정부)’이다. 재정확대 정책은 시장주의 특유의 ‘개인 책임성’ 원칙에도 위배된다. 평소 남의 돈을 빌려 흥청망청 소비하거나 게으르게 살아온 사람은 불황기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시장 규율이 바로잡히면서 경제성장이 다시 이뤄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가 지출을 늘려 ‘책임성 없고 게으른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시장의 정상적 작동을 막는 행위로 간주된다. 또한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인기를 끌기 위해 재정확대로 ‘선심성 정책’을 남용할 수도 있다.
 

ⓒAP Photo재정긴축을 기조로 했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도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재정긴축에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의들도 학계에서 다수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구축 효과(crowding out)론’이 있다. 정부가 정부 지출을 늘리기 위해 돈을 빌리면 금융시장 차원에서 자금 수요가 증가한다. 이에 따라 돈의 가격, 즉 금리가 상승한다. 이로 인해 기업들이 금융시장에서 ‘구축되어(돈을 빌리지 못하게 되어)’ 민간 부문의 투자가 오히려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괜히 돈을 빌리려 들면 민간경제의 활력이 더욱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긴축을 해야 경기가 부양된다’는 논리(Stimulative Austerity)도 있다. 정부가 돈을 빌리는 시점에, 민간의 경제주체들은 다음과 같이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고 한다. ‘정부가 지금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앞으로 세율을 올릴 거야.’ 앞으로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민간 경제주체들은 자신감과 의욕이 떨어져 투자와 소비를 주저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정부가 긴축을 실시하면, 납세자들이 세금 인상에 대한 우려를 떨치고 열심히 투자하고 소비해서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결론이다.

이런 논리와 감성에 근거해서 서방국가의 시장근본주의 보수파들은 1980년대 이후 정부 지출을 법률적으로 규율하는 방법까지 도입한다. 연간 재정적자를 GDP의 3%로 묶는다거나, 재정적자가 쌓인 결과인 국가부채를 GDP의 60%로 한정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는 EU의 ‘안정과 성장 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이 있다. 한국의 기획재정부도 비슷한 내용의 입법을 준비 중이다(40~43쪽 기사 참조).

이와 대조적으로 통화정책은 글로벌 차원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정당한’ 불황 정책으로 각광받았다. 불황기 통화정책은 금리 인하나 통화 공급 확대를 통해 총수요를 자극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부자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도 이전보다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다. 재정확대 정책과 달리 통화정책에서는 빈곤층을 겨냥한 복지 지출 따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통화정책의 주체는 중앙은행이다. 정부나 정치권이 중앙은행의 의사 결정에 개입할 수 없도록 보장하면(중앙은행 독립성), 국가의 시장 개입도 원천봉쇄할 수 있다. 더욱이 중앙은행이 금리와 통화 공급을 조절한다고 해서 정부 부채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통화정책이 주로 부자와 금융자본에 봉사한다는 지적도 있다. 재정정책의 경우, 국가경제 발전에 필요한 부분이나 빈곤층을 짚어내 자금을 투입한다.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을 수 있고 이에 따라 불평등을 완화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통화정책으로 금리를 인하하면,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평등하게’ 자금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무래도 부자가 은행 문턱을 넘기 쉽고, 싼 금리로 큰돈을 빌려 부동산이나 증권 등 자산에 투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차원에서 실물경제가 허덕이는 가운데서도 증권, 부동산 등의 시세는 크게 올랐다. 수혜자는 당연히 부유층이다.

‘통화정책의 독재’가 해체되기 시작한 계기는 2008년 가을 세계 금융위기다. 글로벌 정부들은 공공자금을 파산 직전의 금융기관, 공공 인프라, 복지 프로그램 등에 투입하는 방법으로 대공황을 막아냈다. 천대받았던 재정확대 정책이 세계를 구원한 것이다. 경제위기가 대충 봉합되고 다수의 금융기관들이 정부의 구제금융(재정 투입)으로 붕괴 국면에서 벗어난 2010년 들어, 재정정책은 다시 찬밥 신세가 되고 만다. 통화정책이 복귀한 것이다.

경제정책 축 서서히 이동 중

이후 선진국 정부들은 경기회복을 위해 통화정책을 극한까지 몰아세웠다. 2010년 당시 이미 선진 각국의 기준금리는 사실상 0%인 상태였다. 경제학 교과서와 달리 이토록 낮은 금리에도 불구하고 민간 주체들은 좀처럼 돈을 빌려 투자하거나 소비하려 들지 않았다. 금융위기 이전에 빌린 돈을 갚는 데 급급하거나 혹은 미래의 불안감으로 인해 저축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지출하지 않으면 모두가 돈을 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정책을 통해 민간 부문이 저축보다 투자와 소비에 관심을 갖게 할 것인가?

물가 인상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금리가 0%인데 물가인상률이 2%인 상황에서는 돈을 저축해놓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실이 발생한다. 이렇게 된다면 민간 부문이 저축을 포기하고 투자·소비를 선택할지 모른다. 각국은 통화공급량을 금융위기 이전의 3~4배까지 늘리는 방법으로 물가를 올리려 했다(양적완화). 물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과 EU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일반은행들이 중앙은행에 맡겨둔 준비금에 대해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수료를 내야 하는 제도다. 일반은행들에 대해 ‘중앙은행에 돈을 맡겨두지 말고 시중에 대출해서 경기를 살리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는 비록 기업이나 소비자들에게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돈을 맡기면 이자를 받는다’는 금융의 기본 원칙을 포기한 ‘극단적 통화정책’이었다. 결국 ‘통화정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라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오더니, 2014~2015년쯤에는 IMF 같은 국제기구에서도 ‘재정정책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돈이 널려 있는데도 민간 부문이 대출해서 투자·소비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 돈을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다. 재정확대 정책의 반대 논거였던 ‘구축 효과’론에 따르면, 정부가 돈을 빌리는 것은 민간 부문이 사용할 자금을 가로채는 행위다. 그러나 지금은 민간에서 아예 대출을 포기한 상태다. 더욱이 금리가 역사적으로 최저 수준이므로 정부의 이자 부담도 낮다. 정부가 재정정책을 잘 설계해서 미래의 경제성장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본에 투자해 국가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높일 수도 있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데 투자된다면) 정부 지출은 해당 규모만큼의 편익을 스스로 창출한다(self-financing)”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정부의 재정지출로 경기가 상승하기 시작하면, 민간의 사업 의욕을 자극해서 투자 수준을 높일 수도 있다. 민간 부문을 구축(crowding out)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실물경제로 끌어들이는(crowding in)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IMF는 2015년 10월 발간한 〈세계 경제 전망(World Economic Outlook)〉에서 ‘낮은 수준의 총수요가 투자 의욕을 꺾고, 저투자가 다시 글로벌 경기회복과 성장률을 침식하는 악순환’을 거론하며 재정확대 정책의 필요성을 거론했다. 지난해 2월 보고서에서는 “G20 국가들이 재정지출 여력을 활용해서 공공투자를 확대하는 공조 계획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난해에는 일본·캐나다 등 주요 국가들이 재정확대 정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영국의 보수 정부는 2020년까지 균형재정을 이룬다는 목표하에 맹렬히 추진해온 긴축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었다. 이와 관련, 영국 BBC 방송의 전 이사장이자 저명 경제학자인 개빈 데이비스는 〈파이낸셜 타임스〉(2016년 9월25일) 기고문을 통해 “경제정책의 축이 통화정책에서 재정정책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글로벌 차원에서 단기간 내에 정책 프레임이 근본적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미국, EU 등 주요 국가의 엘리트들이 재정확대 정책을 여전히 기피하고 있다. 그만큼 통화정책의 독재 시스템 및 도그마는 강고하다. 일반 시민들 역시 빚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강하다. 국가부채로 정적을 공격하는 정쟁 방식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다만 국가부채가 증가했다는 이유만으로 분노하거나 국가재정을 둘러싼 정쟁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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