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학습을 갔던 아이가 귀가할 시간이 한참 지났다. 전화를 해보니 친구 ○○가 오후 5시 넘어 집에 가야 한다고 해서 몇 명이 놀고 있단다. 동네 앞에서 헤어졌다는 인솔자의 문자를 진즉에 받았다고 하자 수화기 너머 아이들이 놀라는 기색이 전해졌다. 5시가 넘어야 ○○가 영어 학원을 ‘합법적으로’ 빠질 수 있다는 걸 알고 도와준 것인데, 보호자에게 도착 시간 단체 문자가 갈 거라고는 생각 못한 모양이다. 의리는 있다만 모자란 것은 어찌해야‘쓰까’.

하기 싫은 걸 자꾸 많이 하면 탈이 난다. 특히 방학 때 일과가 꽉 찬 아이들은 세상이 온통 암흑이다. 처지를 바꿔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학부모 너라면 휴가 때 업무 보고 싶겠냐. 간혹 “우리 아이는 자기가 원해서 학원에 가요”라는 분도 있는데, 입시를 앞둔 머리 굵은 아이가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보길 권한다. 수학·영어·논술 같은 학원이 좋아서 가는 아이는 절대 없다. 그 학원 안 가면 딴 학원에 넣을까 봐 혹은 집에서 딴 공부 하랄까 봐 그나마 익숙한 게 낫다 싶어서 좋다고 하는 거다. 애들이 초등 고학년만 되면 이렇다.

ⓒ김보경 그림

만약 저학년인 아이가 좋아서 학원에 간다면? 집안 환경을 돌아보거나 친구 관계를 살펴보길 권한다. 그도 아니라면 부모가 좋아하니까 기쁘게 해주려는 아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효심 깊은 아이라고 성취가 꼭 좋다는 보장은 없다. ‘효도의 총량’이 있다면 그걸 어린 시절 학원 열심히 다닌 것으로 쓰기에는 참으로 아깝지 않은가.

앞서 는 학업에 과하게 내몰리거나 잔머리가 발달한 아이는 아니다. 다만 동네에서 집이 먼 편이라 어울리려면 작정하고 먼 길을 와야 한다. 유독 놀이 욕구가 승하고 관심받고 싶은 마음도 크다. 가끔 길에서 만나면 숨 가쁘게 말을 붙인다. 놀고 싶어서다. 에게 이 겨울 필요한 것은 괜찮은 학원이 아니라 괜찮은 놀이 여건이다. 소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놀이란 ‘관계 맺기’이다. 또래와의 친밀하고 편안하고 즐거운 관계. 선생님도 부모도 어떤 어른도 줄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다.

학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 좋지 않으냐고 여길 수도 있다. 그건 학부모의 ‘믿음의 영역’이다. △△는 초등 저학년 때부터 게시판에 전국 석차가 나오는 학원에 다녔다. 승부 근성도 있어서 이름 올리는 재미에 잘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오갈 때마다 불안해했다. 석차 압박 때문인가 해서 부모는 안심시키기만 했다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몇몇 여자아이들이 떼로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거나 복도에서 길을 막곤 했다는 것이다. 내막인즉슨, 한 아이가 △△를 좋아하니까 가까운 친구들이 도와주려 했다는 것인데, ‘썸타는’ 놀이를 하는 웃자란 여자아이들 틈에서 남자아이인 △△는 부담을 넘어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짧은 시간과 닫힌 공간에서 짜릿한 놀이가 뭐가 있겠나.

는 학원에 갈 때마다 핸드폰부터 챙긴다. 쉬는 시간에 쉼 없이 하다 보니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만 것이다. 좁고 쾌적하지 않은 우리에 갇혀 지내는 생쥐가 모르핀에 쉽게 중독된다는 연구 결과가 떠올랐다.

인기 많은 아이는 ‘시간 많은 아이’

또래에서 인기 많은 아이는 ‘시간 많은 아이’이다. 시간이 없는 아이들은 짬이 날 때 바로 놀기 위해 주로 그 아이에게 연락하고 나아가 잘 보이고 싶어 한다. 시간에 쫓기는 아이일수록 외려 제 일과를 꿰고 있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라는 대로 기계처럼 움직인 탓이다. 혹시라도 빡빡한 일과를 소화해내는 아이가 불만이나 불편을 내비치지 않는다면?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래봤자 해결되지 않는다는 ‘반복된 좌절’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돈과 기운을 써가면서 이렇게 아이들의 시간과 능력을 빼앗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는 억울함과 무력감이 쌓인다. 해질 녘 ‘영혼 없는 표정’으로 학원 버스에 실려 가는 아이들을 본다. 훗날 노을이 질 때마다 막연히 슬퍼지는 이유가 어린 시절 그 시간에 가기 싫은 학원에 가야 했기 때문이라면 얼마나 ‘웃픈’ 일인가. ‘성장기 골든타임’에 놀이가 박탈되고 제대로 관계 맺기를 못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심지어 위험해지는지 매일 뉴스에서 보는 중이다.

기자명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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