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마지막 날, 하루 종일 ‘암트랙(한국으로 치면 코레일)’이라는 기차표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해서 기차표를 검색했다. 2017년 1월21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오전 10시 전에 도착해 오후 5시에 떠나는 당일 왕복 기차표를 예약하려 했다. 필자가 사는 볼티모어에서 워싱턴 유니언 역까지는 기차로 40여 분 걸린다. 결과는 실패. 예매 가능한 가장 빠른 기차표는 오전 11시45분 출발이었다. 1월21일 그날 새벽부터 오전 기차표까지 모두 매진이었다. 비행기 편 사정도 비슷했다. 미국 전역에서 워싱턴 D.C.로 향하려는 이들이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난리였다.

1월21일이 대체 무슨 날이기에? 1월21일 워싱턴행 교통편 매진은 2016년 11월8일 그날의 충격에서 시작되었다. 필자에게도 믿을 수 없는 화요일이었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날이다. 트럼프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고, 다수의 성폭행 혐의를 받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장애인을 비하했으며, 외국인 혐오 표현도 거침없이 했다. 국경에 벽을 치겠다는 ‘창조적인’ 공약을 내세우며 위대한 미국을 만들겠다던 후보가 당선됐다.

ⓒAP Photo지난해 11월8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한 여성이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쓰고 시위하고 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리라 예측한 언론은, 평생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는 할머니를 방송했다. 투표할 수 없던 시대에 태어나 이제는 여성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게 된 그녀는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 영상에서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 할머니만이 아니다.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로체스터에 있는 수전 B. 앤서니라는 여성참정권 활동가의 비석을 찾아 ‘I voted(나는 투표했다)’라는 스티커를 붙였다. 물론 클린턴의 공약에서 여성만을 위한 정책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 덕분에 여성이 만든 수많은 역사들이 미디어에서 복습되었다. 하지만 여성 대통령 후보는 여성혐오 발언을 한 후보를 이기지 못했다.

트럼프 당선이 확정된 뒤 하와이에 있는 한 여성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워싱턴으로 날아가 행진이라도 하겠다고 했다. 하나의 작은 물결이 SNS를 통해 퍼지면서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너도나도 함께하겠다고 했다. 미국 여성 유권자들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인 1월21일 워싱턴에서 행진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신속하게 조직된 워싱턴 행진에 당황하며 불쾌감을 표현한 것은 의외로 흑인 인권활동가들이었다. 미국 역사에서 ‘워싱턴 행진’은 흑인들의 투표권과 평등을 위한 상징으로 통했다. 그런 까닭에 ‘워싱턴 여성 행진(Women’s March on Washington)’으로 이름이 확정되었다.

‘서울 여성 행진’은 ‘강남역’에서

워싱턴 여성 행진은 ‘안티 트럼프’ 슬로건만 내세우지 않는다. 일종의 인권 선언이다. 인종, 성 정체성, 장애, 질병 유무, 나이, 학력, 종교 등 무엇으로도 차별받지 않고 인간 그 자체로서 존중받고 존중하자는 운동이다. 기차와 비행기 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일종의 공동구매 전세버스 서비스인 랠리버스를 통해 워싱턴행 표를 구했다. 랠리버스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얼마나 많은 지역에서 1월21일 워싱턴으로 가려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랠리버스 홈페이지에는 ‘워싱턴 여성 행진’에 대한 친절한 소개가 있었고 회사가 이 행사를 후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랠리버스는 스쿨버스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였다.

당일 워싱턴으로 오기 힘든 이들을 위해 ‘자매 행진’도 결성되었다. 미국의 50개 주와 서울을 포함한 55개의 세계 도시에서 여성 행진이 예정되어 있다. 1월21일 오후 2시 서울의 행진 장소는 바로 그 ‘강남역’이다(twitter.com/MarchSeoul).

기자명 볼티모어·이원우 (영화감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