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성. 그는 의사나 약사가 아니었다. 보건의료 전문가도 아니었다. 일개 환자였다. 기업 컨설턴트로 잘나가던 1999년 서른여덟 나이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여동생에게 골수이식을 받고 기적처럼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 병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싸웠다. 백혈병 환우회를 조직해, 1년에 3600만원을 약값으로 써야만 연명할 수 있는 환자들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2000년대 초반 그가 이끌었던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약값 인하 투쟁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운동이었다. 정부와 다국적 제약회사(노바티스)를 상대해야 하는 무모한 싸움이었다. 달걀로 바위 치기였는데, 3년여 만에 바위가 흔들렸다. 약값은 내려가지 않았지만 건강보험 적용을 받으면서 백혈병 환자의 본인부담률이 30%로 떨어졌다. 2005년 9월 이후에는 백혈병 환자 부담금이 ‘0원’이 되었다. 중증 환자 등록제도로 환자 부담이 10%로 감소한 데다, 노바티스가 ‘환자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보상해준 덕이었다. 영원한 ‘을’인 환자들이 ‘의료 공공성’을 쟁취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 후 강주성씨는 ‘건강세상 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었다. 지금 환자들이 누리고 있는 본인부담금 상한제, 중증질환 등록제, 장기노인요양보험, 병원 식대 급여화 등이 이 단체의 활동 결과물이다. 원폭 피해자 2세, 적십자 혈액관리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의 성과는 혁혁했다. 그러다 2008년 돌연 보건의료계를 떠났다. ‘환자’로서 자신이 할 일은 거기까지라고 봤다.

ⓒ시사IN 이명익강주성 ‘건강세상 네트워크’ 전 대표(사진)는 지난 10년 동안 병원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9년이 흘렀다. 그동안 실업자 생활 2년을 거쳐 중소기업 임원으로 4년 동안 일했다. 언론 접촉도 피하고 살았다. 그러다 일을 그만두었다. 골수이식 후유증이 발생한 것일까.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다시 환자가 되었다.

2016년 연말도 그는 병원에서 보냈다. 목과 입이 이유 없이 허는 병이 3년째 계속됐다. 대상포진을 앓았던 한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안구 건조가 심해 인공눈물 없이는 잠시도 버티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2015년 〈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 개정판 서문에서 밝혔듯 몸이 아픈 것을 “보건의료 환경을 다시 돌아보라는 소리 없는 질책”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1월4일 저녁 그와 마주 앉았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병원 권력은 더욱 공고해지고, 환자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병원이 숙박업과 밥장사로 돈을 번다고 비판했다. 지금도 그렇게 보나.

치료비용보다 숙박료를 더 많이 내는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보험이 적용되는 4인실 이상 병실은 여전히 부족하고, 상급 병실의 보험료 적용은 요원하다. 병원 식대 문제도 그렇다. 2004년 싸움을 시작해서 2006년 보험료가 적용되기 시작했을 때 환자부담률이 20%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50%로 올랐다.

지금 병원 식대가 과거보다 올랐나.

환자가 내야 할 돈이 늘었다는 이야기다. 돌이켜보면 2004년 싸움 때도 병원의 저항이 엄청났다. 당시 서울대병원이나 아산병원의 밥값이 한 끼에 7000~8000원이었는데 한 달 밥값만 70만원씩 나왔다. 보험 급여화가 쟁점이 되자 어떤 산부인과는 미역국 대신 콩나물국을 주면서 저항하기도 했다.

ⓒ연합뉴스2002년 강주성씨(왼쪽에서 세 번째)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글리벡 약값 인하 시위를 벌이고 있다.
10년 동안 의료 현실이 나아지지 않았다?

10년 전과 비교해보면 건강보험 보장률이 오히려 떨어졌다. 10년 전에 67%까지 갔는데, 지금 63% 수준이다. 전체 병원비 가운데 환자가 부담해야 할 돈이 10년 전 33%였다면 지금은 37%로 올랐다는 이야기다. 왜 이렇게 됐을까. 비급여 항목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건강보험 흑자는 20조원이나 쌓였다.

정부는 늘 건강보험 재정이 어렵다고 하는데, 어떻게 수익이 20조원이나 쌓였을까.

환자의 병원 이용률이 준 걸 가장 큰 이유로 본다. 또한 건강보험 보장률이 떨어진 반면 보험료는 올랐기 때문이다. 돈이 남으면 보장성을 높이거나 어린이 무상의료를 실시해야 할 텐데, 그냥 쌓아두고만 있다.

지난 10년 동안 실손보험 시장도 엄청나게 커졌다.

실손보험 가입자 수가 3200만명을 넘었다. 나처럼 과거 병력 때문에 가입 못하는 사람 말고는 다 들었다는 이야기다. 이러면 건강보험 보장성이 확대되지 않는다. 실손보험에서 다 해주니까,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려 들지 않는다. 실손보험사도 고민에 빠졌다. 민간보험이 충당하는 비급여 시장이 커지면서 보험사가 지출해야 할 돈이 불고 있다. 예컨대 지금 모든 정형외과에서 다 하는 체외충격파나 도수치료 같은 경우 한 번 가면 5만원에서 10만원 정도 낸다. 이걸 실손보험에서 내주니까 다들 손쉽게 간다. 이러면 결국 실손보험료도 오를 수밖에 없다. 환자와 공급자가 똑같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게 되는 구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비급여 시장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연합뉴스서울대병원은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에 ‘병사’라고 기록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급여 항목의 시장 규모가 얼마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놀랍다.

대통령 몸에 정체불명의 주사가 찔러지는 세상인데, 정작 정부는 그 주사가 뭔지 시장 규모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보험이 적용되는 급여 항목과 달리 비급여 항목은 관련 기관의 관리·감독을 받지 않는다. 병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양악 수술을 봐라. 전신마취까지 해야 하는 대단히 위험한 수술이다. 이걸 동네 의원에서 하게끔 내버려둔다. 이건 죄악이다. 압구정동 성형외과에는 대개 마취과 의사가 없다. 그냥 콜하면 ‘가방모찌’ 의사가 온다. 문제는 마취과 의사가 가고 난 뒤다. 마취에서 깨어난 뒤 위급 상황에 대처하지 못해서 사고가 생긴다. 비선 의료 논란의 당사자인 김영재 원장은 성형외과 전문의도 아니다. 그럼에도 과를 넘어선 의료 행위를 했다.

결국 정부가 이런 현실을 방치하고 있다.

민간보험에 대한 통제가 시급하다. 2006년에 민간보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당시 보험설계사 수만명이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민간보험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더 큰일이 생긴다. 불가사리를 죽일 수 없으면 가둬놓고 키워야 하는데, 점점 덩치만 커지고 있다. 누군가 이 불가사리를 우리에 가둬야 한다.

건강보험공단은 어떻게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공단이 정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보험가입자위원회에서 공단 이사장을 뽑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도 가입자위원회가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공단에서 떨어져 나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도 공단이 관리해야 한다. 병원 진료비 등을 심사하는 심평원을 따로 떼어놓으니 보건복지부 입김에 휘둘린다. 요즘에는 자동차보험 심사도 심평원이 맡고 있는 마당에 실손보험 심사까지 맡기자는 주장이 나오는 형편이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심평원이 민간보험 일을 대신 해주고 있다. 이건 국민에 대한 배반 행위나 다름없다.

병원도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공급자 위주로 돌아가는 영역이 세 곳 있다. 학교, 법원, 병원이다. 학교나 법원은 나름의 견제나 참여 장치가 있는데, 병원은 아니다. 병원이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고, 환자는 속수무책이다. 백남기 농민 사건을 보라. 서울대병원이 한 환자의 사망진단서를 제멋대로 내놓아도 아무런 제재 수단이 없다. 병원에 너무 많은 권한이 주어져 있다.

의사들은 병원 경영이 어렵다고 말한다.

옛날보다 어려워진 건 사실이다. 의사들은 의료수가가 낮아서 경영이 어렵다고 한다. 사실일까. 나는 토론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지금 의사나 병원이 얼마나 버는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 기업과 달리 병원은 회계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부 등 관리감독 기관도 이를 방치한다. 이러다 보니 병원 원가가 얼마이고, 이익이 얼마인지 모른다. 국회에서 회계 자료를 내놓으라고 해도 안 내놓는다.

과거 보건의료 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뭔가.

적십자가 불량 혈액을 유통하고 있다며 어떤 제보자가 라면 한 박스 분량 자료를 들고 왔다. 그런데 전문가들에게 문의했더니 이 자료가 타당한지 아닌지 입을 꾹 닫더라. 이들 전문가는 이미 적십자와 한통속이었다. 그때 의료계 전문가 집단에 대해 절망했다. 우리는 환자 입장에 서는 전문가가 절실했다. 글리벡 투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보건의료 운동은 완전히 전문가 운동이었다. 글리벡 투쟁은 환자가 스스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 최초의 투쟁이었다.

글리벡 투쟁에도 사연이 많았을 것 같다.

글리벡 투쟁을 1년쯤 전개했을 무렵 노바티스 사에서 내게 제안이 들어왔다. 약값 인하 투쟁을 멈춰주면 당시 환자들이 내야 할 본인부담금(30%, 한 달 약 90만원)을 자신들이 평생 대납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민에 빠졌다. 환우회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우리가 약값을 인정해주고 그 약을 공짜로 먹으면 그 돈은 누가 내는가? 국민들이 보험료로 비싼 약값을 내는 것 아닌가? 제약회사의 제안을 받자고 하시는 분은 나가서 따로 싸우시라.’ 결국 환자들은 그 제안을 뿌리치고 다시 투쟁에 돌입했다. 그 후 노바티스 사장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환자 단체 맞느냐. 어떻게 환자들이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느냐?” 글리벡 투쟁이 세계적으로 의미 있는 기록이 된 것은 백혈병 환우들의 헌신 때문이었다.

강주성씨와의 대화는 어쩌면 착잡했다. 세상에서 가장 ‘약자’인 환자들이 그동안 뒤틀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싸웠으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음을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9년여 만에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입을 여는 것도 이런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 이력’을 털어놓았다. 그는 1980년대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다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KSCM)에서 청소년 운동을 지도했다. 〈푸른나무〉처럼 시대를 풍미했던 무크지 제작을 이끌기도 했다. 이른바 ‘고운(고등학생 운동)’의 대부 격인 인물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급진 중의 급진이었다.

그동안 이런 이력을 숨겼던 것은 보건의료 운동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형병원이나 제약회사 등 그와 대척점에 선 쪽에서 그를 ‘운동권 투사’로 낙인찍을 경우 운동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염려가 컸다. 그는 과거를 숨기고 철저히 환자로 남아야 했다. 그가 펼쳤던 보건의료 투쟁은 그만큼 어려운 산맥을 넘는 것이었다. 산맥 하나를 넘고 보니 또다시 거대한 산맥이 놓여 있다. 그는 지금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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