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학교 교사와 이야기하는 김선옥 대표 교사(가운데).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꿈틀학교’는 2002년 5월에 문을 연 대안학교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17~19세 ‘탈학교’ 학생을 받아 2년 동안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친다. 8월28일, 문 앞에 전봇대가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서 있는 연립주택 같은 학교에서 대표 교사 김선옥씨를 만났다.

현재 꿈틀학교 학생은 25명밖에 되지 않는다. 김선옥씨는 학생을 많이 받지 못하는 까닭을 느릿느릿한 말투로 설명한다. “우리 교육 목표는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교사라기보다는 엄마이면서, 친구 노릇도 하기 때문에 25명 이상을 담당하면 선생님이 힘들어 죽을 거예요.”
김선옥씨는 1964년,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났다. 보수 성향이 강했던 그녀는 1983년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민속문화연구회 동아리에 들었다. 그런데 관심이 있던 민속문화와는 상관없이 사회과학 서적을 파고 데모만 하는 모임이었다. 당연히 선옥씨에게는 그 당시 필독서였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노동의 철학〉 같은 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공회 활동을 했던 그녀는 선배들을 향해 ‘왜 삐딱하게만 사회를 보느냐’며 반항했다. 고민하고 있을 무렵, 성공회 선배가 준 문건에서 눈에 띄는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어렵게 사는 곳에 작은 교회를 만들고 작은 예수가 되는 활동을 해야 이 나라가 건강해진다. 그게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다.”

깡패와 밤새 술 마시며 ‘투쟁과 설득’

그 글에 감동받은 선옥씨는 학교를 졸업한 뒤 뜻을 같이하는 이들 네 명과 서울 상계동 철거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철거민과 함께 용역 깡패와 싸우며 치열하게 살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경제적 약자가 많은 삼양동·정릉4동·미아7동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공부방·탁아소·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여자 몸으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동네에는 깡패 아저씨도 많았어요. 그런데 제가 술을 잘 마셨고 여성으로서 매력이 별로 없었어요. 나를 여자로 보지 않고 동생으로 본 거지요. 그래서 제가 별 탈 없이 거기서 활동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 사람들 성품이 본래 나쁜 것도 아니었고요.”
김선옥씨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호탕하게 웃는다. 선옥씨가 당시 동네 건달과 어울려 새벽까지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던 한 학원 강사는 나중에 그이의 남편이 됐다. 지금 선옥씨에게는 중학교 2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5학년 딸이 있다.

1995년 선옥씨는 봉천동으로 공부방을 옮겼다. 봉천동 공부방에는 집에서 돌보지 못해 오갈 데 없는 청소년이 날마다 들락거렸다. 본드를 흡입하는 아이도 있었다. 선옥씨는 그 참에 청소년 쉼터를 하나 만들었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도 청소년 가출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1998년 선옥씨는 서울시로부터 ‘신림청소년센터’를 위탁받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쉼터나 청소년센터는 한계가 있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형편이 어려운 부모가 돌보지 못해 다시 가출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때마침 아는 사람의 소개로 금융계에서 일하던 이민국씨가 찾아왔다. 그와 선옥씨는 가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아이를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데 뜻이 통했다. 꿈틀학교라는 대안학교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선옥씨에게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다. “우리 아이들은 변화가 더뎌요. 기다리고 참으면서 아이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일이 힘들죠. 그런데 어느 날 지지리도 속을 썩이던 아이가 방송국에서 일한다고 찾아와서 폼을 잡아요. 그걸 본 애들이 ‘방송국에서 일한대’ 하면서 소곤거리죠. 사실 3D 업종인데 말이죠(웃음). 졸업하고 사회에서 건강하게 뿌리내리고 사는 걸 보면 정말 예쁘고 힘이 돼요. 내가 끝까지 참으면서 봐준 게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말을 하는 김선옥씨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었다.

기자명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