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 난에 아예 가새표를 한 평론가도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김난숙 대표(영화사 진진) 역시 지난해 5월 칸 영화제 출장을 준비하면서 신작 소개를 받아봤다. 줄거리를 훑으며 ‘너무나 켄 로치적이군’ 싶었다.

막상 현장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마음이 흔들렸다. 함께 출장길에 나선 정태원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수입 여부를 두고 마주 앉았다. ‘망한’ 경험이 먼저 떠올랐다. 〈자유로운 세계〉(2008, 켄 로치 감독) 개봉 당시 관객이 약 2000명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김 대표에게 정 팀장의 첫마디는 이랬다. “돈은 못 벌겠는데요.” 한마디를 바로 덧붙였다. “근데 영화가 좋잖아요.”

계약 조건은 좋지 않았다. 세일즈사는 패키지딜(한 영화에 다른 영화 여러 편을 끼어 파는 형태)로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팔겠다고 했고, 그만큼 가격도 높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사고 나니 돈이 없어서 다른 영화는 구매할 엄두도 못 냈다. 한국에 돌아오던 날, 김 대표는 선물처럼 BBC 속보를 받았다. 켄 로치 감독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뉴스였다.

ⓒ영화사 진진 제공영화사 진진 임직원(김난숙 대표·가운데)과 〈자객 섭은낭〉의 허우샤오시엔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년 12월8일 개봉)는 영화사 진진의 창립 10주년 배급 작품이다. 진진의 시작에도 켄 로치가 있었다. 창립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역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지난 10년간 진진을 통해 개봉된 영화는 모두 126편. 2016년에는 창립 이후 가장 많은 작품인 16편을 개봉했다. 개봉 성적이 좋지 않아 극장에서 빠르게 내려왔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영화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를 포함해 전 직원 8명이 감당하기에는 ‘불가능한’ 스케줄이었다. 10주년 기념전은 준비 단계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성공은 그래서 더 절박했다. 설상가상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시국도 좋지 않았다. “현실이 더 드라마틱한데 누가 영화를 볼까?” 시름이 깊었다. 홍보마저 난관이었다. 그때 한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시위에 모인 시민들에게 핫팩을 나눠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다. SNS 홍보비로 빼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 핫팩 2만 개를 샀다. 전 직원이 달라붙어 핫팩 위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티커를 하나하나 붙였다. 그런 노력만이 영화를 성공시킨 건 아니겠으나, 입소문을 타고 박스오피스 역주행이 시작됐다. 1월5일 현재 누적 관객 6만2000명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사실은 하면 안 되는 영화”라고 해도…

진진이 지난 10년간 걸어온 길은 한국 다양성 영화의 10년이기도 했다. 한 영화계 관계자의 말마따나 제작에 심재명(명필름)이 있다면, 배급에는 김난숙이 있었다. 김 대표는 23년 전 대우영상사업단에서 한국 영화 사전판권구매팀 일을 하며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1997년 동숭아트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돈이 아닌 ‘문화’를 만지고 싶었다.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 전용관이었던 동숭씨네마텍(‘하이퍼텍 나다’의 전신, 2011년 폐관)의 운영과 독립·예술영화 배급을 맡았다.

2006년 동숭아트센터 구조조정으로 인해 영상사업팀 전원이 회사를 나와야 했다. 당시 부서장이던 김 대표가 영화사 창립을 이끌었다. 정태원 팀장, 장선영 차장과는 동숭아트센터 시절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같이 일하고 있다. 지난 10년은 어땠을까. “잘 버티기 위해 좋게 얘기하면 적당히 움직였다. 누군가는 라인업이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말할 만큼.”

‘적당히’라고 했지만 10년의 라인업이 간단치 않다. 켄 로치의 여러 작품 외에도 〈원스〉 (2007), 〈걸어도 걸어도〉(2008) 같은 흥행작이 눈에 띈다. 국내에 종교 영화 시장을 열어젖힌 것도 진진이다. 알프스 산맥의 수도원을 소재로 다룬 러닝타임 168분짜리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2009)은 단관 개봉으로 관객 9만6000명을 모으는 저력을 보였다. ‘무모한 시도’는 계속됐다. 김 대표가 “사실은 하면 안 되는 영화”라고 평한 〈내셔널 갤러리〉도 진진을 통해 개봉됐다. 러닝타임만 180분이다.

진진이 외화만 수입·배급하는 건 아니다. 여러 국내 독립영화가 진진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우리 학교〉(2007)를 시작으로 〈똥파리〉(2009), 〈지슬〉(2013)이 대표적이다. 〈지슬〉을 만든 오멸 감독의 모든 영화는 진진을 통해 배급됐다. 〈지슬〉 개봉 전 CGV가 배급을 제안했지만 오 감독이 거절했다. ‘잘 안된’ 전작들을 진진이 해줬기 때문이다. 김 대표도 제주 판권을 모두 오 감독에게 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지슬〉은 제주에서만 3만 관객이 들었는데, 제주에서 발생한 수입은 진진이 한 푼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도 돈을 벌었다. ‘인디’끼리여서 가능한 예외적 계약과 성공이었다.

“요즘 옛날 영화 재개봉 열풍이 한창이잖나.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은 어떤 흐름이 영화 개봉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확인된 영화만 보고 싶어 하는 거다. 그러면 새로운 감독은 어떻게 관객과 만날 수 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신카이 마코토도 처음부터 유명 감독이 아니었다.”

지난해 10월8일 영화수입배급사협회가 출범했다. 지나친 경쟁을 막고 합리적 유통 환경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김 대표도 이름을 올렸다. “잘 안될 거라고 보는데 그래서 너무 많은 걸 하지는 말자고 했다. 하나씩 해보고 작은 성공의 경험을 만들고, 신뢰가 쌓이면 거기서 한 걸음씩만 딱 더 가자고.” 진진의 2017년 첫 작품인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 시사회에서는 타사가 수입한 영화의 예고편이 나왔다. 협회사 품앗이가 이뤄지는 ‘작은’ 방식이다.

누군가는 영화가, 영화관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한탄한다. 당장 넷플릭스 같은 위협이 존재한다. 대박은 포기한 지 오래다. 그저 재밌고 좋아서 계속하고 싶은 일. 김 대표에게 영화는 그런 일이다. “정답은 없지만, 현재가 답이 아니라는 건 안다. 남들이 ‘말도 안 된다’고 평가하는 생각을 접지 않으려 한다. 지난 10년간 이 판에서 내가 뭘 배웠는지 돌아보며 영화가 좀 더 흥미로워졌다. 질문을 들고 다시 잘 버텨야지.”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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