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청나게 돈이 많은 사람이고, 그 재산을 다양한 목적에 쓰고 있소. 대부분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사업에 투자하지만, 극히 일부는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쓰고 있소. 오랫동안 내 가장 큰 즐거움은 프로 야구단을 소유하는 거였소. 나는 스포츠를 사랑하고, 야구단이 나한테 안겨주는 명성을 좋아하고, 나를 위해 뛰는 선수들과 어울리는 게 즐겁소.”
미국 작가 폴 오스터가 무명 시절인 1976년 쓴 소설 〈스퀴즈 플레이〉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소설 속 가상의 야구팀 ‘뉴욕 아메리칸스’의 구단주 찰스 라이트는 주인공 탐정에게 자기의 지위를 이렇게 뽐낸다. 라이트의 실제 모델이 뉴욕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77)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양키스가 미국 야구를 대표하는 팀이라면 스타인브레너는 양키스의 ‘보스(Boss)’였다. 보스는 지금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뉴욕 포스트〉는 10월15일 랜디 레빈 구단 사장의 말을 빌려 “스타인브레너가 구단 운영권을 두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고령인 스타인브레너는 몇 차례 건강 문제를 드러냈다. 2003년 미식축구 선수 오토 그레이엄의 장례식에서 졸도했고, 2006년에는 대학생 손녀의 연극 공연을 관람하다 병원에 이송됐다. 올해에는 치매설까지 거론되는 가운데 딱 세 차례 양키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승리는 숨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야구를 사랑했던 스타인브레너가 단 세 차례라니.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정력적인 구단주 스타인브레너도 나이와 건강의 벽은 넘지 못했다.
클리블랜드의 선박업자였던 스타인브레너가 1973년 1월 CBS 방송국사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았을 때 양키스는 2류 팀이었다. 1964~1972년 양키스는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1966년에는 56년 만에 치욕스럽게 지구 꼴찌로 떨어졌다. 1968년 은퇴한 미키 맨틀 이후 이렇다 할 스타도 없었다.
스타인브레너는 ‘제국의 재건’을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했다. 야구계의 변화도 그의 편이었다. 1976년 시즌 도중 메이저리그는 프리 에이전트(FA) 제도를 도입했다. 시즌 뒤 스타인브레너는 FA 최대어인 레지 잭슨을 5년간 350만 달러에 영입했다. 그 2년 전에는 구단주의 연봉 지급 거부로 FA가 된 사이영상 수상자 캣피시 헌터를 사상 최고액인 5년간 375만 달러에 데려왔다. 그 결과 양키스는 1977, 1978년 2년 연속 월드 시리즈를 제패했다.
그러나 정력은 지나쳤다. 빌리 마틴 감독을 다섯번이나 해임했고, 툭하면 단장을 갈아치웠다. 야구장 안팎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청년 작가 오스터가 31년 전 권력욕에 불타는 메이저리그 구단주의 모델로 스타인브레너를 그린건 그런 이유에서다. 〈ESPN 매거진〉이 몇 년 전 선정한 스타인브레너의 기행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1973년 1월 양키스 인수 직후 스타인브레너는 “통상 업무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양키스타디움에 첫 출근한 날 마이크 버크 사장을 해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구단 사무실 화병에 꽃이 너무 예쁘게 꽂혀 있었다”라는 게 해임을 결정한 이유였다.
-스타인브레너와 빌리 마틴은 야구 역사상 가장 험악한 구단주·감독 사이였다. 스타인브레너는 마틴을 다섯 번 감독으로 임명해 다섯 번 모두 해고했다. 1978년 첫 해고 직전 마틴은 “한 명은 타고난 거짓말쟁이에 한 명은 범죄자다”라고 말했다. 거짓말쟁이는 슈퍼스타 레지 잭슨, 범죄자는 스타인브레너였다. 스타인브레너는 1974년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9개월동안 구단주 자격이 정지됐다.
마틴 감독을 ‘다섯 번 임명, 다섯 번 해고’
-1980년 시즌 뒤 스타인브레너는 데이브 윈필드와 10년간 2300만 달러라는 사상 최대 규모 계약을 맺었다. 계약서에는 윈필드가 설립한 재단에 30만 달러를 기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스타인브레너는 1990년이 되자 그 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하워드 스피라라는 도박사에게 윈필드를 뒷조사하도록 했다. 그 뒤 뒷조사 사실이 드러나 망신을 샀다.
-1981년 양키스는 진 마이클 감독의 지휘 아래 전기 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따냈다. 포스트 시즌을 앞두고 스타인브레너는 마이클을 해임하고 보브 레먼을 임명했다. 월드시리즈 뒤 스타인브레너는 “내년에는 시즌 도중 감독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맹세해도 좋다”라고 말했다. 이듬해인 1982년 레먼은 14경기 만에 해임되었다. 후임자는 마이클이었다. 마이클은 1982년에 86경기 만에 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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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스프링 캠프 도중 스타인브레너는 “시즌 초반 성적이 좀 나빠도 요기 베라 감독을 믿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라는 16경기 만에 해고됐고, 오랫동안 스타인브레너를 용서하지 않았다.
스타인브레너의 좌충우돌 속에 1980년대 양키스는 실패를 거듭했다. ‘보스’는 웃음거리가 됐다. 양키스는 늘 돈이 많은 구단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1978년 우승 당시 양키스의 연봉 총액은 메이저리그 평균보다 112% 많았다. 1988년에는 74% 수준으로 떨어졌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른 구단도 비싼 FA 선수에게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스타인브레너는 자신이 불을 댕긴 ‘FA 인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진 셈이다.
1990년 7월30일 스타인브레너는 두 번째로 구단주 자격이 정지된다. 윈필드에 대한 불법 조사 때문이다. 이 일로 스타인브레너는 2003년까지 업무를 볼 수 없었다. 복귀한 뒤로는 과거에 비해 프런트를 믿었다. 유망주 육성에도 무게를 뒀다. 데릭 지터, 버니 윌리엄스, 앤디 페티트, 호르헤 포사다 등은 이런 가운데 성장한 선수들이다. 단장이던 보브 왓슨은 출루율을 기준으로 타자들을 양성했다. 조 토리 감독은 1996년 양키스 감독직을 수락하며 “구단주는 20년 동안 부드러워졌다. 마틴이랑 싸우던 때의 스타인브레너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미국 경제의 호황과 메이저리그 흥행 열기는 스타인브레너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수입을 무기로 스타인브레너는 최고의 선수를 긁어모을 수 있었다. 올해 양키스의 연봉 총액은 1억9552만 달러로 전체 평균(8305만 달러)보다 135%나 많다. 양키스는 1998~2000년에 네차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월드 시리즈 우승은 없지만 1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기록하고 있다. ‘프로야구단 운영은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투자’라고 말한 찰스 라이트와는 달리 스타인브레너는 야구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2002년 설립한 스포츠 케이블 방송 ‘YES 네트워크’는 올해 자산가치가 30억 달러에 이른다. 양키스 구단의 가치는 12억 달러를 넘어선다. 스타인브레너의 성공 이후 구단과 스포츠 케이블 방송을 모두 소유하는 모델은 새로운 스포츠 비즈니스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은퇴 뒤에 스타인브레너는 과연 어떻게 양키스 구단주 시절을 회상할까. 폴 오스터의 소설에서 구단주는 이렇게 말했다. “찰스 라이트가 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기분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