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세, 3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자리,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라는 사람들의 입에선 뻔히 예상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튀어나온다. “전 모르는 채로 진행된 일입니다.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에, 그게, 모르겠습니다”. 12월6일, 박근혜 게이트 관련 국정조사 자리에 불려 나온 대기업 총수들은 뇌물 증여 혐의를 비롯한 각종 의혹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계속 무능을 연기했다. 회삿돈 수십억원이 막후 권력자의 주머니로 왔다 갔다 하는데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기업 회장, 무엇을 물어봐도 연신 ‘송구하지만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처참한 한국어 회화 실력을 뽐내기 시작한 기업 부회장.

ⓒMBC 화면 갈무리1990년대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장삼이사들은 혀를 끌끌 찼다. 살아남기 위해 멍청한 척을 하는 뻔뻔함도 한심하지만, 만에 하나 저게 연기가 아니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모두를 감쌌다. 오로지 상속자란 이유만으로 거대한 경제주체의 사령탑이 되어도 좋은 걸까? 분노와 경악 속에 국정조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더 이상 기업은 꿈을 이룰 수 있는 무대가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한때 기업이 꿈과 낭만과 자아실현이 가능한 청춘의 일터로 묘사되던 시절도 있었다. 20여 년 전 온 나라를 차인표 신드롬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를 살펴보자. 주인공 강풍호(차인표)는 서울백화점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유학 중 급히 귀국해 경영에 참여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업자이자 공동 경영인이었던 정한수(김진태)와 그의 아들 정도일(천호진)의 견제에 하마터면 경영에서 밀려날 처지에 놓인다. 심지어 연인 고은채(이승연)를 정도일에게 빼앗기며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풍호는 여러 사람의 조력과 지지를 받으며 위기를 극복한다. 백화점 상무(박영지)부터 구두 매장에서 근무하는 말단 직원(권해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급의 조력자들을 두루 살피며 성장한 풍호는, 경쟁자 도일이 회사 지분을 경쟁사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증거를 입수해 제출함으로써 회사를 위기로부터 구해내고 도일을 쫓아내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다.

아버지를 잃고 사악한 이들에게 왕위를 위협받던 왕자가, 중신으로부터 시종에 이르는 여러 조력자들을 두루 곁에 두고는 그 힘으로 일어서 끝내 왕국을 지켜낸다는 동화 속 왕위 계승 서사가 고스란히 기업 위에 투사된 것이다. 그렇기에 정당한 승계권을 위협하는 이는 반드시 사악해야 하고 무엇인가 능력이 결핍된 인물이어야 한다. 탐욕으로 가득 찬 악역 도일이 불임으로 설정된 것은 그가 결실을 볼 능력도 결여된 채 제 것이 아닌 걸 탐내는 인간임을 상징하는 장치다.

ⓒSBS〈미스터Q〉에 등장한 주인공은 회사를 지켜내면서 승계권을 위협하는 악역을 쫓아냈다.
물론 여기에 진정한 사랑의 승리가 빠지면 안 된다. 의류 매장 직원인 이진주(신애라)와 풍호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재벌 2세와 평범한 서민의 연애는 은채와의 사랑 없는 정략결혼으로 제 입지를 굳히려던 도일의 선택과 극적 콘트라스트(대비)를 이룬다. 풍호는 심지어 색소폰을 불고 오토바이 타고 손가락을 까딱이느라 바쁜 와중에도 진주를 괴롭히던 친오빠 이치한(김기호)을 징벌하는 정의로움까지 뽐낸다. 이로써 풍호는 정의롭고 진실하며 제 사람을 진심으로 챙기며 정당한 상속권을 이어받아 기업의 미래를 설계하는 완벽한 왕자님으로 완성된다.

정리해고와 무한경쟁이 판치는 ‘또 하나의 가족’

IMF 시기에 방영을 시작한 허영만 원작의 드라마 SBS 〈미스터Q〉(1998)의 무대가 되는 라라패션은 각종 루저들이 좌절을 딛고 일어나 재도전할 기회를 움켜쥐는 재기의 무대다. 오해, 사생활 문제, 사내 정치 실패, 면접 실패 등을 이유로 대기발령 됐다가 개발과에 유배된 일군의 루저들은, 낙담하는 대신 어떻게든 동료들과 힘을 합쳐 재기하려고 노력한다. 그런가 하면 극중 최고의 악역인 황천방 전무(명계남)가 제 야욕을 채우기 위해 추진하는 일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직원들을 해고할 기회를 노리는 것과, 다른 회사와 인수합병을 해 제 지위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합리적인 기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여겨지는 정리해고나 대기발령, M&A 같은 일들은 1998년만 하더라도 악역이나 하는 일, 명백히 나쁜 일이었던 것이다. 회사에는 직원에게 대기발령 처분을 내리는 걸 안쓰러워할 줄 아는 어른 나승태 상무(박영지)가 있고, 그와 개발실 직원들의 활약을 통해 황천방을 쫓아내고 일터를 지킬 수 있었다.

ⓒ시사IN 이명익12월6일 열린 박근혜 게이트 국회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대기업 총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IMF 체제 초기였으니 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 이전만 해도 한국인에게 직장이란 한번 들어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곳이었고, 연봉제가 아니라 호봉제가 적용되는 공간이었다. 회사는 이러한 고용 안정을 제공하는 대가로 권위를 획득해, 직원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제 혈족에게 기업을 세습하며 오너 중심의 독단적인 의사 결정을 정당화했다. 안전한 울타리를 지키는 가부장과 가부장에게 순종하는 가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부장제 가족 모델을 닮은 이 경제체제는 한때 두웨이밍 하버드 대학 교수가 주창한 ‘유교 자본주의’라는 용어로 개념화되기도 했다. 대기업들은 제 임직원들을 ‘가족’이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흔적은 대우의 오랜 슬로건이었던 ‘대우가족’의 기억이나, 아직도 임직원 전용 쇼핑몰을 ‘삼성가족구매센터’라 이름 붙인 삼성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모두 하나로 뭉쳐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다시 안정적인 직장과 경제성장이 보장된 유교 자본주의 성공신화의 궤도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한국인들은, 실제 삶 속에서 정리해고와 기업의 줄도산이 이어지는 걸 목격하면서도 〈미스터Q〉가 주는 위안에 기꺼이 채널을 맞췄다.

그때도 사람들은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 대충은 짐작했을 것이다. 회사는 ‘실력이 우선’이라는 말로 호봉제를 철폐하고 연봉제를 도입해 회사 안에서 무한경쟁을 유도하고, 경쟁력 강화라는 이유로 큰 회사가 작은 회사를 집어삼키는 걸 정당화했다. 평생직장은 고사하고 평생 비정규직, 무기 계약직, 파견노동 등 불안정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여전히 충성을 요구하고 오너 중심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및 경영권 세습도 이해하라고 윽박지르는 기업 사이의 불화도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미래까지 염려하기엔 당장 처한 IMF 체제가 너무 힘들었고, ‘다시 또 시작해. 이제 한 번 쓰러졌을 뿐. 늘 그래왔잖아. 세상 끝에 발이 걸려도 다시 또 일어나 이렇게 뛰어가면’ 된다고 노래하는 김민종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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