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지금 저, 최순실, 죄송합니다. 저도 이제 나이 들어서, 저….”(김기춘)
“이제 와서 나이 핑계 대지 마시고요.”(박영선)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이제 보니깐 제가 못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순실이를 알지는 못합니다. 최순실이라는 사람하고 접촉은, 접촉은 없었습니다.”(김기춘)
동영상 하나로 꼿꼿하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무너졌다. 2007년 7월19일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 검증 청문회 당시 현장 영상이었다. 질문자는 박근혜 후보에게 “최순실씨를 서면조사하고, 육영재단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조사했고, 최순실씨와 관련해서 재산 취득 및 경로를 집중적으로 추적했다”라고 말했다. 최태민 일가의 재산이 박 후보의 차명 재산이 아니냐는 의혹 등 ‘박근혜·최태민 일가’의 관계는 당시 청문회 핵심 쟁점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김기춘 당시 박근혜 캠프 법률자문단장의 모습도 화면에 잡혔다.
12월7일 ‘박근혜 게이트’ 2차 청문회의 결정적 장면이었다. 같은 날 오전까지만 해도 김 전 실장은 “최순실의 존재 자체도 몰랐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는 사이였으면 전화 통화한 기록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검찰이 조사하면 된다는 자신감까지 보였다. 그랬던 그가 2007년 영상을 본 다음에는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김 전 실장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는 온종일 반복했던 말을 바꿨다. 자신이 최순실씨를 모른다고 한 건, 지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고 정정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윤회 문건’을 직접 들고 와 질의하면서 김 전 실장의 증언은 한 차례 무너진 상태였다. 그는 “정윤회 문건을 본 적은 있지만 최순실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기에 전혀 몰랐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박 의원이 제시한 문건에는 ‘최태민의 5녀 최순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전 실장은 꼿꼿이 버텼다. “최순실이 지시해 김기춘을 공관에서 만났다” “최순실이 김기춘에 대해 ‘고집이 세다’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와 같은 차은택 감독의 증언이 있었지만 김 전 실장은 또박또박 반박했다. 김 전 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로 차 감독을 만났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최순실씨 존재는 JTBC의 태블릿 PC 보도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최씨를 모른다고 하는 이유는, 함께 ‘국정 농단’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부인하기 위해서다. 현재 김 전 실장은 직권남용 등 혐의로 피의자 신분이다.
증거가 없으면 철저하게 ‘모르쇠’로 일관
여야 의원들은 김 전 실장에게 집요하게 물었지만 그는 물증이 있을 때만 말을 바꿨다. 뒤늦게 기억에 오류가 있었다거나 나이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발언을 뒤집었다. 증거가 없으면 김 전 실장은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고, 청와대 비서실 산하 총무비서관·부속비서관·의전비서관·연설기록비서관 및 민정·외교안보·홍보 등 10개 수석실을 지휘하는 대통령비서실장을 18개월 가까이 했는데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에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오늘 모른다고 한 게 100번은 넘는다. 김기춘 실장만 두고 끝장 청문회를 하자”라고 의사 진행 발언을 하기도 했다.
특히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김 전 실장의 검찰 후배이기도 한 최교일 새누리당 의원이 물었다.
“매일 아침 9시경 대통령이 머리 손질한다는 보도가 있다.”(최교일)
“대통령 관저 내에서 일어난 일은, 사사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른다.”(김기춘)
“2013년 8월부터 2015년 2월까지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그 정도는 알지 않나.”(최교일)
“대통령 관저에서 사사롭게 일어난 일을 제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대통령이) 몇 시에 일어나시고 머리를 먼저 하시고 이런 거 몰랐다.”(김기춘)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이 오후에 머리 손질을 했다. 정 아무개 원장이 출입했다. (대통령 행적에 대해 사회적 논란이 일어났으니) 그 정도는 (내부) 조사에서 드러났을 것 같은데.”(최교일)
“몰랐다.”(김기춘)
이에 대해 황영철 새누리당 의원이 “결국 대통령이 세월호 당일 관저에서 사사롭게 있었다고 인정했다”라고 지적했다.
김 전 실장은 자신 있는 부분은 세세한 내용까지 읊으며 반박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폭로한 김 전 실장의 문체부 1급 공무원 인사 개입이 대표적이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해당 공무원들의 나이까지 정확히 말했다. 김 전 실장의 ‘선별적 기억력’에 의존한 발언은 철저히 법리에 기반한 답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설사 ‘무능한’ 비서실장으로 비치더라도 향후 특검 수사 등을 대비한 모르쇠 답변을 한 것이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 다이어리’ 내용도 부정
청문회 당일 온종일 쟁점이 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다이어리’도 마찬가지였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를 뜻하는 ‘長(장)’이라는 부분이 수시로 등장했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부터 특정 작가의 작품 전시 금지까지 깨알 같은 지시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수첩에 쓰여 있는 내용은 대부분 실행되었다. 이를 근거로 김 전 비서실장이 주재한 수석비서관 회의가 사실상 청와대 ‘공안검사 회의’가 아니었냐는 비판이 나왔다.
“‘시신 인양 안 된다, 했을 경우에는 정부 책임과 부담으로 돌아온다’라는 이야기를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이 했고, 그 내용을 김영한 민정수석이 받아 적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김경진)
“저는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 회의를 하다 보면 노트 작성할 때 주관적인 생각도 가미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도 한다.”(김기춘)
“그러한 (하지도 않은 말을 기재하는) 민정수석을 기용하고 일을 같이 했다는 겁니까?”(김경진)
“그 내용은 (다이어리에) 없습니다마는, 해수부 장관과 긴밀히 (시신 인양을) 의논한 적 있다. 저도 자식이 죽어 있는 상태인데 시신 인양하지 말라 하겠습니까?”(김기춘)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다이어리 내용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발언이었다. 이 다이어리는 김 전 수석의 직권남용 혐의를 뒷받침해줄 핵심 증거다. 피의자 신분인 김 전 실장은 다이어리 증거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 김 전 실장이 “(김영한의) 주관적인 생각도 가미되어 있다”라고 일방 주장을 펴도, 김 전 수석은 고인이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김 전 실장은 지난해 ‘성완종 리스트’ 사건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숨지기 직전 ‘김기춘 10만 불 2006.9.26日 독일 벨기에 조선일보’라는 메모를 남겼다. 언론 인터뷰에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돈을 줬다는 구체적인 진술도 했다. 2006년 김기춘 의원은 박근혜 의원의 독일 순방을 따라갔다. 출장비 등 자금 출처가 의심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김 전 실장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메모 내용을 뒷받침해줄 성 전 회장이 숨져, 김 전 실장의 “관계없음”이라는 주장을 검찰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 청문회에서도 김 전 실장은 ‘성완종 리스트’를 묻는 질문에 “문무일 특별팀에서 무혐의 내린 사건이다”라고 대답했다. 김영한 전 수석의 다이어리에 대처하는 김 전 수석의 태도에서 성완종 리스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기춘 전 실장에 대한 수사는 박영수 특검팀이 맡는다. 박 특검도 ‘김기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김기춘 전 실장에 대해 “논리가 보통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박영수 특검팀이 이번 청문회를 참고한다면, 김 전 실장의 공략 포인트를 잡을 수 있다. 최순실씨와 몰랐다는 작은 부분부터 파고들어갔듯, 세세한 진술의 신빙성을 무너뜨린다면 ‘김기춘 스타일’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청문회를 넘긴 김기춘 전 실장 앞에 이제 특검 수사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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