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부터 촛불이 세상의 중심에 섰다. 주말을 거듭할수록 더 환하게 불을 밝히며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기존 권력들을 뒤흔들었다. 야당은 처음에 대통령을 어찌해야 할지를 두고 우왕좌왕했다. 촛불 민심이 얼마나 타오를지 눈치를 살폈다. 지금까지 민심과 소통하지 못하고 그만한 신뢰도 없었다는 방증이다. 매주 촛불의 함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태도를 정돈해갔다. 제1야당 원내대표가 “광장은 광장의 방식으로, 국회는 국회의 방식으로”라던 초기에 비하면 전향적인 진일보이다.

대통령 역시 촛불의 준엄한 위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청와대 관저에서 숨죽여, 아마도 처음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민심을 느꼈을 것이다. 촛불의 눈높이에선 턱없이 부족한 담화이지만 주말마다 사과의 수위를 높여야 했다. 보수 언론의 변신은 놀라웠다. 대한민국 기득권의 고리를 지키는 선봉장이 소리 높여 촛불을 찬양하니 말이다.

이때를 얼마나 고대해왔는가! 오랫동안 절망하면서도 어찌할 줄 몰랐다. IMF 구제금융 때부터 따진다면 거의 20년이다. ‘헬조선’이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같은 처절한 단어들을 입에 올리지만 솔직히 희망을 말하긴 어려웠다. 세상을 어찌 바꿔야 할지 막막했고 이를 수행할 세력도 마땅치 않았다. 서구에서는 제도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정당, 다수 조합원을 포괄하는 노동조합이 그 역할을 해왔으나 한국에선 이들이 그만한 권위를 지니지 못했다.

 

ⓒ시사IN 신선영


그래서 촛불이 소중하다. 이전에 혼자서, 각자 뿔뿔이 탄식하며 발버둥 쳐야 했다면 이번엔 한자리에서 한목소리로 만났다. 동료 시민들과 걸으면서 자동차로 숨 막혔던 거리가 해방의 광장으로 변하는 걸 체험하는 건 마술 중의 마술이다. 헌법의 주권자가 스스로의 능력을 확인하며 자신감을 얻어가는 소중한 과정이지 않은가.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을 켜든, 지역 어느 곳에서 이를 지켜보든 같은 마음으로 공감하고 경험하는 일, 이러한 ‘연대’로부터 역사의 새 장은 열린다. 정당이 가진 입법·행정권도, 노동조합이 행사하는 파업권도 없지만 대통령·야당·언론을 꼼짝 못하게 하는 아래로부터의 역동적 ‘시민권력’이 등장한 것이다.

시민들은 말한다. “우리가 세금이 아니라 복채를 내고 있었다”라고. 이재용 일가를 위해 국민연금기금이 동원되었다는 뉴스에 “이러라고 국민연금 냈나”라며 어이없어 한다. 실제 세금과 보험료를 내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게 나라냐’는 탄식에는, 정말 흔쾌히 세금을 납부하고 긴 노후를 공적 연금에 의지하고픈 기대가 담겨 있다. 대한민국을 온전한 나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촛불이 바꾸려는 건 대통령에 그치지 않는다. 촛불을 지탱하는 심지 곳곳에 민생의 애절한 요구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포근한 보금자리여야 할 주거가 전월세 걱정거리가 되어버리고, 정부가 있음에도 민간 보험에 기대야 하는 우리 사회를 바꾸자는 절규이다. 또한 학생들이 과도한 입시 경쟁과 사교육에 짓눌리지 않고, 청년들이 괜찮은 일자리를 가지는 꿈이다. 한국전쟁 이후 박정희에서 박근혜까지 이어온 승자 독식과 차별에서 벗어나 공존과 협동을 중시하는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다.

시민권력이 대선 후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어야

1987년에도 거리로부터 시민혁명이 있었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고, 노동자이면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이번엔 모두가 함께 먹고사는 민생 민주주의를 향한 출항이다. 이미 2008년 촛불에서 선보인 ‘함께 살자, 대한민국’, 2010년 무상급식 이후 부상한 복지국가의 소망을 현실화하는 발걸음이다.

대선이 내년 봄이나 여름으로 앞당겨질 듯하다. 정치권이 더욱 분주해지겠지만 촛불에게 주어진 역할도 막중하다. 대통령까지 끌어내리는 시민권력, 그 주권자의 자부심으로 교육·일자리·주거·병원비·노후 등 우리를 힘겹게 하는 또 다른 억압을 걷어내는 연속 혁명의 길이 앞에 있다. ‘퇴진’이라는 명확한 요구가 힘을 집중시켰듯이, 이제 민생 의제별로 핵심 요구를 하나로 집약하는 지혜가 요청된다. 예를 들면, 병원비에선 ‘민간 의료보험 대신 건강보험 하나로’, 주거에선 ‘집 걱정 대신 공공임대 주택’ 등으로 집약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시민들이 아래로부터 토론하고 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에너지를 충전하게 될 것이다. 어느새 다가온 대선, 주인공은 후보가 아니라 시민이 든 촛불이다. 후보 검증을 넘어 시민권력이 후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더 약진하자.

 

기자명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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