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존경하는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역사를 서술한 그의 책에 이런 제목을 붙였어. ‘The Age of Extremes’, 즉 ‘극단의 시대’.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1914년에서 1991년까지야. 1914년이라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해이고 1991년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던 때다. 이 시기 인류는 가장 많은 인류의 목숨을 바친 파국적인 전쟁을 겪었고 지구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들을 손에 쥔 반면,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전과 경제성장을 경험했으니 ‘극단의 시대’라고 명명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홉스봄이 말한 ‘극단의 시기’와 생애를 같이하는 역사가 있으니 그건 바로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일 거야.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뒤끝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탄생했으니까 말이지.

수천만명을 굶겨 죽인 경제정책 실패나 그에 필적하는 생명을 앗아간 피의 숙청이 소련 역사에 엄존했지만 그래도 현실에 등장한 소련은 전 세계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어. 소련의 압력을 거부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던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 티토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크렘린 궁의 시계 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AP Photo1959년 1월8일 아바나에 입성한 피델 카스트로가 연설을 하고 있다.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의 깃발과 그 깃발의 펄럭임에 실려 흐르는 인터내셔널가(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을 호소하는 노래)는 티토를 비롯해 전 세계 각지의 피압박 민족 노동자·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치로 혁명을 꿈꾸었던 이들은 아프리카부터 유럽, 아시아를 거쳐 미국의 코앞 중남미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어. 오늘은 그중 하나를 얘기해보자.

19세기 말 한 스페인 사람이 당시 스페인령이던 쿠바로 이주해왔어. 농장주가 된 그는 결혼해 두 아이를 얻지만 이혼하고 가정부였던 여자와 재혼하게 돼. 그 사이에서 자녀 5명이 태어나. 이 중 둘째가 피델 카스트로였지. 1926년생.

여담 하나 잠깐 하자. 몇 해 전 한국과 일본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결승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카스트로는 “한국 봉중근이 일본에 노출된 것이 패인이다”라면서 경기를 분석하는 등 야구열을 과시했다고 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왔다고나 할까. 그는 어려서부터 야구광이었어. 실력도 꽤 괜찮아서 미국 프로야구단 뉴욕 양키스에 입단 테스트까지 받았었다고 해. 그런데 뉴욕 양키스는 그를 불합격시켰어. 농담 삼아 아돌프 히틀러가 어린 시절 그의 꿈이던 오스트리아 국립미술아카데미에 합격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뉴욕 양키스로서도 미국 턱밑의 종기를 제거할 기회를 박차버린 셈이지. 야구선수의 꿈을 포기한 피델 카스트로는 변호사가 되었고, 사회에 눈을 뜨고 그 살인적인 모순에 분노하면서 미국과 그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에 맞선 혁명가로 성장해나갔으니까.

하지만 그는 천재적 전략가는 아니었어. 야구로 치면 번트 따위는 댈 생각 없이 치고 달리는 히트 앤드 런 신봉자였다는 편이 옳을 거야. 1953년 7월26일 소규모 군중을 이끌고 몬카다의 정부군 병영을 공격하는 모습은 가히 전성기 때 박찬호의 공을 담장 너머로 넘기겠다고 호언하는 리틀 야구선수 같았지. 곡소리 나게 두들겨 맞고 체포된 그는 재판정에서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쿠바의 소농 85%는 임차료를 지불해야 하고 늘 계약 해지를 통고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가장 비옥한 땅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의 손에 있으며 (중략) 해안가 토지 대부분은 미국 과일회사와 서인도제도의 소유로 돼 있습니다. (중략) 저는 동료들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EPA카스트로의 유해가 화장된 뒤 쿠바 전국을 순회하고 12월4일 묘지에 안장됐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이 유명한 열변으로 이 혁명의 리틀 야구선수는 일약 혁명 야구팀의 유망주로 부상하지. 15년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년 뒤 특사로 풀려난 그는 멕시코로 건너가 절치부심 새로운 기회를 노려. 그는 멕시코에서 강력하지만 컨트롤이 문제였던 그의 강속구를 받아줄 멋진 배터리를 만나게 돼. 바로 체 게바라였지.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그의 혁명 동료들은 스페인 외인부대 출신의 베테랑으로부터 맹훈련을 받으며 혁명의 구질을 가다듬다가 마침내 1956년 11월 멕시코의 한 해변에서 그란마 호라는 오래된 배에 올라. 정원이 12명인 한 배에 82명이 올라탄, FBI와 멕시코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장 불편한 항로를 택한 이 신흥 혁명 야구단은 일주일이 넘는 항해 동안 거의 초주검이 된다. 그들의 배 ‘그란마(할머니)’는 쿠바 땅을 눈앞에 둔 산호초 지역에서 좌초하고 말았고 이 풋내기 혁명 야구단은 죽을 듯이 헤엄쳐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어. 1956년 12월2일  마침내 1루 베이스를 밟은 거야.

그러나 시원한 안타라기보다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서 겨우 이뤄낸 내야 안타였다. 팀원들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지. 거기에 이 풋내기들의 1루 진루를 허용한 것에 분노한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의 군대는 맹렬한 공격을 가해왔어. 카리브 해를 함께 헤쳐 나온 동료들이 허무하게 죽어나갔다. 결국 남은 것은 스무 명 남짓. 그러나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쿠바 혁명 야구단은 바티스타 측의 공세를 끝끝내 막아내며 바티스타를 두들겨 강판시키고 말아. 바로 1959년 1월1일 쿠바 혁명의 성공이었지.

그러자 배후에 있던 미국이 직접 나서서 이 버르장머리 없는 쿠바 혁명 야구단을 향해 빈볼부터 싱커까지 별별 공을 다 던져댔으나 실패하고 말았어. 미국의 CIA는 무려 638회나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했고 카스트로에 반대한 쿠바인들을 훈련시켜 쿠바에 상륙하게도 했지만 참담한 실패를 겪고 말았던 거야. 미국 사회학자 라이트 밀스 교수의 〈들어라 양키들아〉 중 인상 깊었던 장면은 카스트로가 미국에 맞선 최전선을 방문했을 때 쿠바 수비군의 외침이었단다. “미군이 이곳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 살아 있는 쿠바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근 60년이 흘렀구나. 현재 쿠바가 행복해졌느냐? 결국 가난에 찌든 나라 아니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는데 아빠는 사회주의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던 바로 옆 나라 아이티를 비교해보자고 대답하고 싶어. 혁명이 없었다면 쿠바의 바티스타 역시 수십 년 정권을 누리다가 자식에게 넘겨주면서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배를 불렸을 것이 뻔하고, 그럴 때 쿠바의 형편이 진흙 과자로 배를 채우는 아이티 국민에 비해 나을 바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반문도 당연하지 않겠니.

홉스봄이 갈파한 ‘극단의 시기’에는 많은 뜻이 있겠지만, 아빠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들의 집요한 의지가 (사회주의 혁명의 범주를 벗어나서) 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거구의 상대를 거꾸러뜨리고 항복을 받아내는 일이 가능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환희와 각오가 가장 폭넓게 펼쳐졌던 때인 동시에 그 빛이 가장 격심하게 배반당하고 혹심하게 바래버리기도 했던 시기라는 뜻도 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극단의 시대를 뒤로하고 ‘최후의 20세기 인물(이건 아빠가 그에게 바치는 칭호다)’ 피델 카스트로가 죽었어. 그의 ‘은퇴’에 복잡한 색깔의 꽃다발을 전한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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