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범죄나 사건의 진상을 설명해주는 명백한 증거를 ‘스모킹 건’이라고 한다. 1893년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셜록 홈스 시리즈물 〈글로리아 스코트호〉에 등장한 ‘연기가 올라가는 권총(smoking pistol)’이란 표현이 살짝 변형됐다. 미국에서 닉슨 대통령의 탄핵 소추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74년 7월14일 〈뉴욕 타임스〉 칼럼에 등장해 요란하게 부활한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유행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는 정황 증거는 많았지만 ‘깊은 목구멍(deep throat)’이라고 불린 내부자의 제보 외에는 결정적 한 방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권력형 비리 사건치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만큼 ‘연기 나는 총’이 많은 경우도 드물다. 발사된 흔적이 남은 총을 다 모으려면 무기고가 따로 필요할 지경이다. 이 일에 가담한 자들이 그만큼 국민 무서운 줄을 몰랐거나,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둘 다일 수 있다는 얘기다. 닉슨을 사임으로 몰아간 ‘깊은 목구멍’의 정체는 33년 동안이나 베일에 가려 있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내부자의 입은 너무나 쉽게 열려 맥이 빠진다. 저들 사이에서는 조폭만큼의 알량한 의리마저 발견할 길이 없다.

ⓒ한성원그람
이 사건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구타 혹은 구토를 유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미덕도 아주 없지는 않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애착을 갖고’ 지켜보는 인물 가운데는 김병준씨와 한광옥씨도 있다.

김병준씨는 지지율이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어져버린 대통령이 지명한, 국회가 인준할 가능성이 0%인,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해괴한 지위를 덥석 받아들이고 버티고 있다.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한 지금에도 ‘빨리 여야가 합의해 총리를 임명하라’는 헛소리만 해대는 중이다. 이분의 정신세계는 박근혜 대통령의 그것만큼이나 난해하다. 대통령병 환자란 말은 들어봤어도 총리병 환자란 말은 들어본 일이 없지 않은가.

박근혜 대통령이 지명한 사람이니 오죽하겠느냐 생각하면 그만이겠으나 이분은 노무현 정부가 중용했던 이 아니던가. 노무현 정부는 정치 식견도, 국민에 대한 존경심도 없는 이런 정도의 인물을 걸러낼 능력조차 없었던 걸까. 더구나 사람을 천거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의 정점에 있던 분이 지금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재인 전 대표가 아닌가. 노무현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는 이들은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나는 김병준씨야말로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이유를, 좀 더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노무현 정부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국민 대통합이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상까지 찾아가는 쇼를 벌인 뒤 나중에는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은 것 같은 이 대국민 사기에 힘을 보태겠다며 달려갔던 이가 한광옥씨이다. 그는 3년 넘게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아 할 일 없이 빈둥대다가 궁지에 몰린 박 대통령이 비서실장 자리를 제안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정상이라면 화를 내기에 앞서 부끄러워서라도 진작 위원회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인생 목표가 오로지 ‘한자리’인 것 같은 이분도 국민의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한광옥씨가, 권력자의 마음에 쏙 드는 말만 속삭이는 자들이 국민의 정부에서도 득세했다는 확고한 증거다. 두 사람은, 정치인이나 정당이 지금의 국가적 재난을 수습하는 데 한계가 있으리라는 점을 말해주는, 연기 나는 총이다.

개 꼬리 3년 묻어둔다고 노루 꼬리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재벌들이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에 앞다퉈 뇌물을 바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활동한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토지에 중과세를 하지 않으면 사회 불평등을 잡을 수 없다는 토지공개념의 창시자인 헨리 조지가 100년도 더 전에 한 말을 내 나름으로 소화해서 간추려보면 이렇다.


막대한 부를 가진 자들은 집권당이 아무리 부패해도 항상 지지한다. 부자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해서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법이 없다. 잘못된 통치에 대항해 투쟁하지도 않는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위협을 받더라도 대항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지도 않는다. 대신 권력자들을 매수해버린다. 정부가 부패하면 할수록 부자들이 이용해먹기는 점점 쉬워진다.


근래에는 재벌의 갑질이 유난히 심해서 저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더욱 눈에 띈다. 비행기를 돌리지를 않나, 운전기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다가 일회용 컵처럼 버리고, 주차관리원에게 노트북을 집어던지며 기세등등하던 그들은 박근혜 대통령 혹은 최순실 앞에서는 쪽도 못 썼다. 그들의 아버지들이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에 그랬던 것처럼 불평 한마디 못하고 돈을 갖다 바쳤다. 직원들에게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CJ의 이미경 부회장 같은 이는 청와대의 위협에 혼이 나가 미국으로 도망쳐 한국에는 얼씬도 못 하는 형편이다. 한 세대란 세월은 이 사회의 풍경에 조금도 세련미를 보태지 못했다.

얼핏 보면 재벌들이 피해자 같지만 사실은 착시이다. 재벌들의 일관된 목표는 부의 집중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견제 기능을 무력화해야만 한다. 정부의 경제 감시 기능을 마비시키는 데는 뇌물만 한 특효약이 없다. 먼저 달라고 하지 않을 때가 약간 골치 아플 뿐이다. 군부독재하에서,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그들의 목표는 변함이 없었고 대체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부를 위협하거나 매수해 규제를 하나하나 풀어버렸다.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고, 해고를 일삼아 실질적인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서는, 전 세계의 불량한 자본가가 찬탄을 금치 못할 만한 위업을 달성했다. 골목 구멍가게와 빵집까지 먹어치우다 저항이 심하자 잠깐 주춤한 상태다. 아마 그대로 두면 결국 서민이 대출받은 동전 한 닢마저 털어먹을 때까지 그들의 진군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각종 세제를 비웃으며 어렵지 않게 3세, 4세 상속에 성공해 한국에는 세습귀족 계급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역대 대통령이 모두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언했으나 대한민국은 소득 기준으로 세계 제2위의 빈부격차 대국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상위 10%는 전체 재산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하위 50%는 고작 5%를 갖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30년 전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30%를 벌었는데 지금은 50%를 번다. 국민소득 중 노동소득은 60%, 돈이 돈을 버는 소득이 40%여서 앞으로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바로 ‘금수저’ ‘헬조선’이란 냉소이다.

최순실의 검은손, 재벌은 반겼을 것

헨리 조지에 따르면 경제 정의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극도로 돈이 많은 사람과 극도로 돈이 없는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권력을 잡은 이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그는 극단적으로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노예 주인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을 쓴다. 한 나라에서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방치하면 보통선거는 부자의 정치적 영향력만 강화할 뿐이라는 뜻에서다. 사람들은 현실에 신물이 나서 신선한 인물이나 당을 찾지만 결국 소속만 바뀐 동일한 자들을 뽑고 절망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돈 많은 사람들이 권력의 부패를 유발한다는 헨리 조지의 말에 딱 들어맞는 사례가 삼성이다. 2007년 삼성은 내부자(법무팀장)였던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 조성과 상속 과정에서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렸다. 특검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른 끝에 간신히 이건희 회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아 철창행을 면했다. 이건희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삼성은 경영쇄신안이라는 걸 내놓았다. 지금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건희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지도 않았고 삼성은 경영쇄신안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8년 만에 최순실 일가를 매수하는 데 앞장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삼성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비자금 은닉이나 불법 상속 자체가 아니다. 그런 짓을 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의 감시 기능을 부패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특검이 투명인간 취급을 해버린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은 정치권뿐만 아니라 법원·검찰·국세청·금융감독원에 뇌물을 뿌렸다. 기자나 교수 가운데서도 정기적으로 돈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이번에 삼성이 최순실씨에게 접근한 것도 이재용씨로의 순조로운 경영권 이양을 위한 예방주사 차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성과 삼성을 닮고 싶어 하는 기업들이 뿌리는 뇌물은 정부와 민간의 경제범죄에 대한 민감성을 떨어뜨린다.

최순실씨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다. 학력이나 경력이 자기 딸만큼이나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최씨 일가는 어떻게 해서 수천억원이나 되는 돈을 주무를 수 있었을까. 아버지 최태민이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업고 기업들로부터 강탈한 돈이 종자였음에 틀림없다. 수십 년간 그 돈을 은닉하고 불리는 과정에서 수많은 불법 행위가 벌어졌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최씨 일가가 일군 엄청난 부는 대한민국의 경제 감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재벌 기업들이 뭉칫돈을 미르재단이니 K스포츠재단이니 하는 수상한 곳에 몰아줄 때 금융감독원은 아무런 경보도 울리지 못했다.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대혼란에 빠트린 사건이 터진 지금도 감사원이나 국세청, 금융 감독 기관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사건 뒤에는 반드시 경제 문제가 도사린다는 점을 간과한다. 51.6%의 유권자가 미친 짓만 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국민이 빈부격차를 좁히고 경제 정의를 다시 세우겠다는 기본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한 봉변도 당할 수 있다. 미국 유권자가 마치 ‘화염병을 던지는 듯한 심정으로’ 트럼프를 찍은 것도 빈부격차와 관련이 깊다. 최순실 일가는 난장판이 된 경제를 손보지 않으면 로봇만이 아니라 깡패도 대통령에 당선할 수 있다고 소리 지르는, 연기 나는 기관총이자 대포이다.

참고한 활자:〈사회문제의 경제학〉(돌베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김영사)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