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수 작가 ‘권력 3부작’의 최종작인 SBS 〈펀치〉(2014~2015)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지난 회 지면에서,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정치적 냉소가 퍼져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나는 희망을 이야기했던 작가가 불과 1년 뒤에 선보인 차기작에서는 절망의 극한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박 작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평범한 이웃들의 활약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로 정의가 실현된 세상을 〈추적자 더 체이서〉에서 그렸다. 하지만 악인이 되어서라도 황금의 제국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었으나 끝내 금수저들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한 흙수저 주인공이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황금의 제국〉을 집필하며 1년 사이 전망의 양극단을 오갔다.

박경수 작가는 세 번째 작품 〈펀치〉에서는 다시 선이 이기는 세상을 그린다. 그악스럽게 살아온 주인공 박정환 검사(김래원)는 어쨌거나 마음을 바꿔 자신을 희생하고 가족들을 살려냈다. 부패와 위선으로 정환의 인생을 망쳐온 장본인들이자 권력욕의 노예인 윤지숙 국무총리(최명길)와 이태준 검찰총장(조재현)은 감옥에 갔다. 자, 이것은 희망인가?

ⓒSBS 화면 갈무리SBS 드라마 〈펀치〉의 주인공 김래원(박정환 검사 역)과 조재현(이태준 검찰총장 역).
다시 살펴보자. 〈추적자 더 체이서〉에서 “가난과 조롱을 이겨내고 성공했으며, 그 성공을 이어나가기 위해 악인이 되어버린” 개천 용 강동윤(김상중)은 끝까지 주인공의 행보를 방해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적대자)에 머무른다. 대통령 선거 당일 백홍석(손현주)이 공개한 녹음 파일 앞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압도적인 투표율로 동윤의 당선을 저지한다. 개천 용 동윤은 날아오르기 위해 과거의 자신과도 같던 개천의 주민들을 짓밟길 서슴지 않았고, 바로 그들의 손에 의해 징벌당한다. 동윤이 가난과 조롱을 견뎌야 했던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악행이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반면 〈황금의 제국〉의 개천 용 장태주(고수)는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주인공)의 자리에 가 있다. 태주의 본질은 동윤과 다를 바 없지만, 그의 악행은 아버지를 잃은 태주의 슬픔과 설움, 흙수저이지만 금수저를 이겨보겠다는 간절한 열망에 덮여 면죄부를 얻는다. 전작에서 개천 용의 악행을 징벌했던 개천의 주민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태주와 성진그룹의 싸움에 치여 희생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추적자 더 체이서〉의 갈등 구도는 “프로타고니스트:개천 주민(백홍석)↔안타고니스트:개천 용(강동윤)↔금수저(한오그룹)”였다. 개천 주민들은 용을 끌어내려 징벌하고 금수저에도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황금의 제국〉의 갈등 구도는 “프로타고니스트:개천 용(장태주)↔안타고니스트:금수저(한오그룹)”로 축소되며, 시민들의 역할은 대폭 줄어들거나 포커스 아웃이 된다. 그리고 〈펀치〉에 와서는 마침내 개천의 주민들이 아예 시야에서 사라진다. 검찰과 재벌, 정치권이 상상을 초월한 욕망을 드러내고 싸우는 동안, 옳은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해보겠다는 소신을 지키려던 신하경 검사(김아중)는 윤지숙에게 뒤통수나 맞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정도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정환이 주도하는 온갖 사술과 편법은 목적이 정당하기에 응원의 대상이 된다. 검사조차 사술에 걸리면 목숨을 잃을 판인데, 평범한 시민들이 설 자리가 있을 리 없다.

정치적 냉소는 아래에서부터 주도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방식으로 심화된다. 시민사회, 누리꾼, 평범한 이웃들의 참여 같은 이야기는 점점 극에서 자리를 비우고, 일반 시민들은 철저히 배제된 채 엘리트들끼리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벌이는 싸움이 그려진다. 급기야 악과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선인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정도를 벗어나도 괜찮다는 이상한 승리가 기념된다. 시청자들은 윤지숙과 이태준 사이의 파워게임 결과에 따라 노골적으로 위계관계가 휙휙 바뀌는 모습을 보며 권력의 생리를 비웃는다. 하지만 정작 그걸 비웃는 시청자의 절대다수가 그 권력 구조 안에는 끼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다들 알면서도 언급을 꺼린다. 작가는 더 이상 평범한 대중에게서 시작하는 정치 변혁 같은 걸 믿지 않고, 시청자 또한 자신들이 주체로 호명되는 자리를 피한다. 위에 있는 놈들은 그놈이 다 그놈(박정환·이태준·윤지숙)이지만, 그래도 뭔가를 바꿀 수 있는 힘도 위에 있는 놈들에게나 있다는 식의 자포자기다.

ⓒSBS 화면갈무리SBS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손현주(가운데)는 용의주도한 재벌 2세 최민재 역을 맡았다.
이런 변화가 2012년 대선을 기점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우연도 비밀도 아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와 문재인이 획득한 표는 각각 1577만 표와 1469만 표였다. 1469만 표는 제6공화국의 그 어떤 당선인도 받아본 적 없는 규모의 표였는데, 그도 그럴 게 정부·여당이 싫은 이들에게는 별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보 단일화 협상 방식을 두고 지루한 공방을 계속하던 안철수는 돌연 사퇴했고, 심상정은 후보 단일화를 했으며, 이정희 또한 선거 막판에 후보 사퇴를 했다. 원래도 유의미한 득표를 얻지 못했던 좌파 블록은 그나마 단일한 후보를 내는 데 실패하고 김소연, 김순자 두 후보로 나뉘었다. 그랬으니 당시 문재인이 받은 1469만 표는 본디 문재인을 지지했던 민주계 유권자의 표심뿐 아니라 새누리당 출신 행정수반을 그만 보고 싶다는 이들의 표심을 거의 모두 결집한 숫자였던 것이다. 도저히 패배할 수 없는 지지율과 전례 없던 득표수였는데 너무도 허망하게 졌다. 변혁을 이야기하던 이들 사이에선 당연히 “우리끼리 힘을 모아봐야 무엇 하느냐”라는 패배감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의 싸움으로

이기는 싸움을 하는 것이 간절해진 이들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고, 그 궁리는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식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열망은 ‘나의 싸움’에서 ‘나’를 지우고 ‘이길 수 있는 사람’을 넣는 극단적인 대리전이거나,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좋으니 이기면 그만이라는 지점까지 뻗어 나갔다. 극단적인 예로, 2016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시 대표는 당의 위기를 타개하고 계파 갈등을 수습해 총선을 진행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김종인을 ‘모셔’왔다. 박근혜 정부 탄생에 지대한 기여를 한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당의 정체성이나 색깔과는 그 결을 달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지만,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 적잖은 수가 이 결정에 열광했다. 두 차례 수권을 했고 세 자릿수의 의원을 보유한 정당이 자력으로 인물을 키우고 적소에 배치하는 일을 못해 적진에서 사람을 데려오느냐는 자괴감을 토로하는 이보다, 어쨌거나 이길 줄 아는 사람을 데려왔다는 기쁨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러한 냉소의 흐름은 비단 브라운관 안에만 반영된 것은 아니다. 한때 ‘조폭 영화’와 동의어였던 ‘한국형 누아르’ 장르는 어느 순간부터 비리나 부정부패와 싸우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다음 회에는 지난 몇 년간 한국 극장가를 수놓은 어떤 영화들, 특출 난 검사와 양심 있는 기자와 포기를 모르는 경찰이 나와서는 끈적한 구악을 시원하게 소탕하는 종류의 ‘사이다’ 영화들의 범람을 함께 살펴보자.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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