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받아든 상대가 말했다. “‘상원(Sangwon)’이죠? 저는 마이크(Mike)라 부르면 됩니다.” 마이크는 지난달 미국 취재에서 현지 가이드를 맡은 시청 고위 공무원이었다. 그는 다른 현지 취재원들에게 나를 “한국에서 온 기자 상원”이라고 소개했고, 그들 역시 직위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다. 무척 편했다. 시장님과 국장님, 회장님께라면 꺼렸을 질문들이 미로(Miro)나 닐(Neale), 데이비드(David)에게는 쉽게 나왔다.

ⓒ시사IN 양한모

한국에서는 ‘불편한’ 취재원들을 자주 만난다. 직위는 차치하고 우선 나이로 위아래를 가늠하는 사람들이다. 나 같은 20대 기자들은 쉽게 얕잡아 보인다. 코웃음 치며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씀인데”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다. 말을 낮추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내가 ~를 했어요. 근데 ~는 아니잖아” 하는 식이다. 그들이 50대 기자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광경은 상상하기 어렵다. 젊은 여기자들은 더한 일도 겪는다고 한다. 귀동냥한 바로 정치팀은 더 심한 모양이다. 많은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들이 기자에게 말을 낮춘다고 한다. 최근 전직 여당 대표가 기자를 “너”라고 호칭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 기자는? 조금이라도 안면을 튼 정치인에게 기자는 “선배”라고 부른다. 의원뿐만 아니라 그 보좌관, 비서들에게도 그렇게 부른단다.

이렇게 쓰인 ‘선배’라는 말이 참 거북하다. 어떤 호칭을 대체하는 용어인지 영 찜찜해서다. 회사 안과 밖에서 쓰이는 “선배”는 각각 의미가 다르다. 사내에서 “국장님” “팀장님” 대신 선배라고 부를 때, 상대는 ‘결정권자’에서 ‘경험이 많은 (같은) 기자’로 끌어내려진다. 하지만 “의원님” “보좌관님” 대신 ‘선배’란 호칭으로 부를 때, 관계가 이중으로 꼬인다. 공적 관계는 사사로워지고, 취재 대상과 주체가 상하 관계로 묶인다.

11월4일 대국민 담화를 마친 박근혜 대통령에게 현장의 기자들은 질문하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선배’라는 호칭으로 얽힌 관계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취재팀장, 출입기자단의 선임들, 청와대 관계자 ‘선배’들을 거스르고 대통령에게 질문할 기자는 드물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대통령이야말로 선후배 관계의 정점에 있는 ‘대선배’ 아닌가?

어떤 특종이 정치인들의 ‘후배’ 손에 쓰였는지 나는 잘 모른다. 알게 되더라도 언론인이 아닌 사람을 선배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선배에게 질문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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