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은 “제가 나이 여든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역모를 하겠습니까”라고 부르짖었지만 역모 앞에서는 용서가 없었지. 그는 꼼짝 못하고 형틀에 얽어매여 볼기를 까게 돼. 그 늙은 엉덩이와 허벅지에 인정사정없는 곤장질이 가해졌지. 그런데 몇 대 맞기도 전에 강순은 허무하게 항복하고 말아. “신이 어려서부터 곤장을 맞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불러서 제 패거리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예종은 움찔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식이라면 매 한 대에 사람 이름 서너 개씩은 주워섬길 판이라, 자칫하면 거기 도열해 있던 신하들 전부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으니까. 예종은 고문을 중지한다. 강순의 이 경고는 고문의 잔인한 특성 하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즉 고문이란 어떤 사안의 진실을 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문자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한 절차라는 거.
해를 달이라 부르게 만드는 고문
언젠가 만민공동회(1898년) 얘기를 해준 적이 있지? 아관파천이 끝나고 대한제국이 성립한 뒤, 외국의 이권 침탈에 저항하고 자주독립의 의기를 드높인 서울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이자 오늘날 촛불 시위의 원조라 할 역사적인 사건. 그런데 이 만민공동회의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문과 관련된 일이었단다.
“풍설에 들으니 죄인들을 악형으로 취조하여 사지를 상한 사람이 있다 하니 개화하려는 나라에서 어찌 이러한 야만의 법률을 쓸 수 있는가. 설혹 악형에 못 이겨 횡설수설로 거짓말을 한다면 애매한 사람만 상하고 임금의 호생하시는 성의를 어기는 것이요 설혹 진실을 말하더라도 잔혹한 형벌에 못 이겨서 하는 말을 개화한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다. 만일 풍설과 같이 악형으로 취조했으면 각국 사람들이 대한 정부를 야만 정부라 할 터이니 이처럼 국체를 손상할 일을 우리 정부에서 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김정인 지음, 책과함께 펴냄).”
비록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만민공동회의 열기를 뜨겁게 지펴 올린 장작 가운데에는 ‘고문 금지’와 ‘연좌제 부활 반대’의 목소리가 선연히 끼어 있었단다. 그들도 알고 있었지. “잔혹한 형벌에 못 이겨서 하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자백을 얻기 위해 사람을 망가뜨리는” 행위는 그 후로도 120년 동안 이어져왔음을 슬프게 얘기할 수밖에 없겠다. 얼마 전 함께 본 영화 〈자백〉은 그 명백한 증거이고 말이야.
매질이란, 고문이란 그런 거야. 해를 달이라고 부르게 만들 수도 있고, 아빠가 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름과 행각을 마치 그린 듯이 줄줄 읊도록 할 수도 있지. 영화 〈자백〉 속 불쌍한 간첩 용의자들 역시 국가권력에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강요받았어. 꼭 주리를 틀고 매를 때리는 것 외에도 고문은 많단다. 때를 알 수 없는 감금, 사기까지 감행하며 사람을 옭아맬 증거를 조작하는 국가의 압박, 가족을 틀어쥐고 들이미는 협박, 그 모두가 사람 잡는 고문이지. 원하는 대답을 강요하여 누구든 그 앞에서 무장해제돼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까지 뒤집어쓰게 만드는 짐승 같은 야만. 오빠를 간첩으로 고발하도록 몰고 도무지 견디다 못해 스스로 귀한 목숨 끊게 만드는 파렴치.
영화 〈자백〉을 함께 보면서 아빠는 가끔 몸 둘 바를 몰라 어깨를 뒤척이곤 했단다. 특히 후일 무죄로 판명 난 그 많은 간첩 사건들의 장구한 스크롤을 보면서는 네게 미안해지기까지 하더구나. 아빠가 널 낳아 기르는 이 나라가 부끄럽고 그 역사가 수치스러워서 말이다.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그 하수인들이 자행한 인간 이하의 고문으로 조국에 공부하러 온 재일동포(재일 한국인) 청년의 몸과 마음이 부서졌다. 그 후 내내 폐인처럼 살았던 그가 수십 년 만에 꺼낸 한국말, “한국은 나쁜 나라입니다”는 날선 창처럼 느껴져 아빠 가슴을 찌르더구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한 사람을 잔인하게 망가뜨린 자들이 ‘나는 모르는 일이노라’ 잡아떼면서 던지는 미소는 굵은 소금이 되어 가슴의 상처 속을 헤집었고 말이야.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뒤 아빠는 꿈을 꾸었다. 통쾌한 악몽이라고나 할까. 꿈속에서 아빠는 악마가 됐어. 김기춘이나 원세훈 등 고문을 지휘하고 자백을 짜낸 정보기관의 수장들을 고문하는 역할이었지. 꿈속에서 아빠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밟고 주리를 틀었어. 그들은 곧 강순처럼 항복하더구나. “제가 맞은 적이 없어서… 저 간첩 맞아요 엉엉.” 한 번 더 몽둥이를 드니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을 왕초로 한 북한 간첩단 조직도를 순식간에 그리지 않겠니. 아빠는 꿈속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단다. “너희도 이럴 줄 알았잖아. 똑같은 사람인 걸 알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니, 응?” 아빠는 울고 있었다. 영화 〈자백〉 속 주인공이 되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법정에서 항의하던 바로 그 간첩 용의자가 되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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