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가족이 노부모 개호(介護, 간병·케어의 일본식 표현)를 담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자식이 노부모를 돌보다 생활이 어려워지거나, 자살·살인 등 극단적인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개호가 가정 내 문제가 아닌, 사회 공통의 과제라는 인식이 퍼졌다. ‘개호의 사회화’가 유행어처럼 번졌다. 그 일환으로 2000년 4월1일 개호보험제도가 도입됐다. 일본 개호보험은 2008년 7월 한국에서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원조 격이다.

개호보험 외에도 현재 일본에서는 독신 가족의 일과 개호 생활 병행을 돕기 위한 ‘육아휴업·개호휴업 등 육아 및 가족 개호 중인 노동자의 복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시행 중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용률이 저조하다. 정부는 고용주와 노동자 모두에게 적극적인 활용을 권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2010년에 발족한 시민단체 ‘케어러스 재팬 연맹(www.carersjapan.com)’에서는 ‘개호자 지원법을 실현하기 위한 시민 모임’을 설립해 개호 중인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추가 법률 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개호의 사회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어왔을까? 답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일본 사회학자 오치아이 에미코 등은 가족에 의한 수발을 전제로 구성된 개호보험제도가 오히려 가족의 책임을 더 강하게 요구하는 ‘재가족화’ 현상을 초래하였다고 지적했다.

ⓒEPA일본 니가타 현 우라사의 한 노인요양원에서 의료 도우미가 노인들의 식사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자녀 혼자서 노부모를 수발하는 독신 가족(single carer)의 증가로 개호의 사회화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일본에는 어떠한 독신 개호 가족들이 있을까? 필자는 지난해 4월부터 ‘치매 가족 지원 시스템 구축에 관한 한·일 비교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 일본 내 독신 개호 가족 구성원들을 만나왔다. 그 가운데 네 가족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독신 개호의 과제와 대책을 살펴볼 수 있다.



초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정보’

사무직으로 일하는 40대 독신 여성 미치코 씨(가명)는 최근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심해져서 인터넷을 통하여 관련 정보를 검색했다. 방대한 정보량에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직장 동료들에게 조심스레 어머니 증상을 이야기하며 업무 조정 등 이해를 얻고자 했으나 다들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이제 막 개호 생활을 시작한 미치코 씨는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필요한 정보를 엄선하기가 쉽지 않았고 지역사회에서 실제로 이용 가능한 서비스와 의료기관에 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다. 실제로 개호 생활이 막 시작된 많은 가족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각 시정촌(市町村·기초지방자치단체)에 설치된 ‘지역포괄지원센터’에 가족 지원을 담당 업무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70대 노인이 90대 부모를 ‘원거리 개호’

개호 가족 지원 비영리단체 ‘쓰도이바 사쿠라짱’과 ‘파옷코’의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오사카에서 건축가로 근무하던 70대 독신 남성 이토 씨(가명)는 고향인 구마모토에서 생활하는 노부모를 개호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신칸센을 타고 고향 집에 내려간다. 원거리 개호를 3년째 지속하고 있다. 당연히 교통비와 신체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평소 고향 집에 내려가지 못할 때에는 90대 아버지와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를 한다. 노부모를 살피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 크다.

이토 씨는 그나마 개호보험을 이용하는 부모님의 담당 케어 매니저와 수시로 연락하며 원거리 개호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개호보험을 이용할 경우, 담당 케어 매니저와 연계가 잘 되면 독신 가족 처지에서는 든든한 응원군이 생기는 셈이다. 1990년대에 처음 등장한 ‘원거리 개호’라는 말이 현재 일본에서 사회 용어로 정착할 정도로 광범위한 현상이 되었다. ‘파옷코(www.paokko.org)’라는 관련 비영리단체도 활동 중이다. 이토 씨의 사례는 또한 ‘개호 수발자의 고령화’라는 새로운 과제를 보여준다.

10년간의 간병을 끝낸 후 찾아온 것은…

도모코 씨(가명)는 대학교 졸업 이후 홀로 남은 어머니와 생활하며,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둘이서 여행을 다닐 정도로 사이좋은 모녀지간이었다. 도모코 씨가 50대 후반에 접어들 즈음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주간보호센터에 보내봤으나 출퇴근 시간과 주간 보호 시간이 맞지 않아 홈 헬프 서비스를 병행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주간보호센터 이용을 거부한 뒤 회사를 조기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10년간의 독신 개호 생활은 지난해 초에 끝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녀는 본인의 노후에 대한 불안과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빠져 괴로워했다. 도모코 씨에게 도움이 된 것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 비영리단체 ‘쓰도이바 사쿠라짱(www.geocities.jp/tsudoiba_sakurachan)’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다른 가족 개호자들을 위한 지원활동을 하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실제로 많은 개호자들이 장기간 수발 생활을 경험하거나 혹은 끝낸 이후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다. 그런 이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는 자조 모임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14년간 일과 개호를 병행하다

미호 씨(가명)는 외할머니의 노인 시설 입소를 둘러싸고 어머니 형제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본인(당시 20대)이 외할머니를 집에서 모시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미호 씨와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와의 3대 동거 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특히 외할머니의 치매 증상이 심해지면서 24시간 눈을 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던 미호 씨와 어머니는 일과 개호를 병행하는 생활을 14년간 이어갔다. 개호 생활이 끝난 지금 미호 씨는 60대 후반에 접어든 어머니의 노후가 걱정이다. 본인 스스로도 40대에 접어든 독신 상태이다.

스스로가 개호자들의 고충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씩 개호 가족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개호자들의 사회적 고립을 막기 위한 활동이다. 앞서 소개한 직장인 미치코 씨는 평일에만 운영되는 지역포괄지원센터를 이용하기 어려워 곤란을 겪던 중 이 모임을 알게 됐다. 미치코 씨를 비롯한 여러 초보 개호자들이 이 모임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교류하며, 미호 씨 스스로도 모임을 통해 힘을 얻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찍이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어 개호 가족 문제를 맞닥뜨린 일본의 경험은 이제 막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일본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호 가족의 일과 개호 생활 병행을 위한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 둘째, 별거 가족에 의한 개호 생활 지원을 위한 교통비 할인 정책 등 지원책이 정비돼야 한다. 셋째, 개호를 이유로 조기 퇴직한 독거 가족의 노후 생활 보장을 위한 사회보장 시스템 재점검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 병든 부모를 돌보는 독신자가 ‘고립’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와 지자체, 민간이 함께 이들을 도와야 한다.

기자명 김원경 (일본 지쿠시조가쿠엔 대학 인간과학과 사회복지코스 전임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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