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다시 읽었다. 이 소설이 출간될 당시에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소설을 전개하는 작가의 고백이 짙은 노스탤지어를 뿜어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때문인지 작가는 이 소설에서 ‘개인적 추억’을 무의식의 가장 낮은 차원으로부터 끌어올리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설의 서술 방식 역시 그의 다른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플롯의 능란한 배치를 통한 극적 효과를 고려하는 대신, ‘자유연상’에 가까운 회상에 의존함으로써, 소설을 읽는 독자의 공감적 몰입이 더욱 강렬해질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과감하게 유년의 기억을 고백적으로, 미추(美醜)를 초월한 장엄한 바다의 율동에 가깝게 표현한다. 현기영의 소설을 꼼꼼하게 읽지 않은 독자는 흔히 간과하는 것인데, 그는 매우 예리한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 예리한 스타일리스트가 역사적 비극인 4·3항쟁의 고통을 무의식 깊숙이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물론 개인적 고통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그러한 역사의 운명조차도 그는 이 소설에서 풍요로운 기억의 육체 안에 풍부하게 용해시키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고백하고 있는 유년은 분광기를 통과한 태양빛이 그렇듯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가장 어두운 부분은 4·3항쟁과 한국전쟁이라는 엄혹한 역사적 상황 안에서, 죽고, 쫓기고, 두려움에 떨며 절규하는 제주인에 대한 고통스러운 장면들이다. 그 고통스러운 장면의 앞뒤에는 무능한 바람둥이 가장이자 헌병 중사로부터 육군 대위로 진급하지만, 결국 중년의 몰락기로 접
어든 아버지에 대한 사춘기 소년 특유의 날카로운 반발감과 뾰족한 대결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작가 현기영은 제주 4·3항쟁과 한국전쟁(위)에서 고통받는 가족사를 소설에 펼쳐냈다.
그러나 작가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어두운 기억 대신, 팽팽한 유년의 망각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청아하게 고백한다. 그 아름다움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가장 화려한 부챗살을 펼치는데, 부재한 아버지를 대신한 장남이 흔히 갖게 마련인 성장기의 좌충우돌과 모성에 대한 끌림은 이 소설에서 백미를 이루는 부분이다. 소설 속의 어머니 역시 신산하기 짝이 없는 삶의 도정에서도 넉넉한 인생훈을 아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간다”라는 말이나 “살다보면 살아진다”라는 말은 언뜻 평이해 보이지만, 이 간명한 명제들이야말로 끔찍한 고통조차도 마술적으로 극복하게 만들었던 민중적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시종일관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투명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삶과 죽음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중년의 성숙한 유머를 상기시킨다. 실제로 이 소설을 거듭 읽다보면, 유머는 성숙한 자의 미덕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된다.

기자명 이명원 (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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