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론지상에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사자성어를 한 번쯤 들어봤을 거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다’는 말이고,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권세가나 힘 있는 자를 등에 업고 이른바 ‘진상짓’을 한다는 뜻이지. 이렇듯 호랑이 어깨 위에 타고 앉아 마치 자기가 백수의 왕이라도 된 양 세상을 호령하고 주변을 현혹시킨 여우들은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 즐비하고 우리 역사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 그런데 역사 속의 얄미운 여우들의 면면 가운데에는 간간이 여성들도 끼어 있단다.

먼저 생각나는 건 명종 임금 때 정난정이지. 아버지는 양반이었지만 어머니는 관비(官婢)였기에 어김없는 천민 신분이었던 그녀의 선택은 기생이 되는 거였다. 기생으로 고관대작들을 상대하다가 중종의 부인이었던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눈에 들어 그 첩이 되지. 욕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윤원형의 본처를 독살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앉게 돼. 어린 왕 명종의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는 문정왕후에게 찰싹 들러붙은 정난정은 천민으로서 꿈도 못 꿀 ‘정경부인’ 칭호까지 얻고 본격적인 호가호위를 시작해. 시전 상인들과 결탁해서 매점매석을 감행하여 폭리를 취하거나 막대한 뇌물을 받는 건 기본이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배를 쫄쫄 곯고 있는데 부처님께 공덕 쌓는다고 그 금싸라기 같은 쌀을 한강에 몇 섬씩이나 쏟아붓는 악행도 연출하지. 그러나 문정왕후라는 호랑이가 죽자마자 이 영민한 여우는 남편 윤원형과 더불어 끈 떨어진 갓이 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어.

ⓒ연합뉴스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한 뒤 퇴장하고 있다.
또 하나 유명한 호가호위의 주인공으로 안동 김씨 세도가 한창일 때 안동 김씨 일문의 수장이라 할 김좌근의 애첩 양씨를 들 수 있을 거야. 지난 여행 때 네가 맛있게 먹었던 나주곰탕의 고장 전라도 나주 사람이야. 그녀는 어려서부터 그 미모로 호남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고 마침내 세도가 김좌근의 눈에 들어 그 첩이 되었어. 정1품 정승에게나 붙이는 ‘합하’(閤下)라는 호칭에다가 고향 나주를 붙여 ‘나합’이라 불렸던 이 여자 역시 김좌근의 힘을 믿고 엄청난 권세를 부리지. 사람들은 김좌근보다도 오히려 나합에게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었고, 팔도의 사또와 감사들도 김좌근을 제쳐놓고 나합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썼다고 해. 나합의 집을 드나들던 물장수가 나합의 눈에 들어 북청 군수라는 벼락감투를 쓰고 금의환향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 이 나합이란 여자의 호가호위 짓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

그런데 조선 말기 정난정이나 나합 정도와는 비교가 안 될 호가호위의 주인공이 등장한단다. 이번엔 기생이 아니라 무당이었어. 정경부인 정난정이나 나합이라 불린 양씨에 못지않게 그녀는 왕족 또는 공신에게나 주어지는 ‘군(君)’ 칭호를 받았지. 진령군(眞靈君)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터졌어. 13개월 동안 봉급을 못 받다가 그나마 나온 봉급이 모래 반 쌀 반인 엉터리임을 알게 된 구식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구식 군대는 부정부패의 책임이 왕비 민비(아빠는 명성황후라고 부르지 않는다. 민비는 비하된 호칭이 아니고 당시 백성들도 부르던 호칭이었다)와 그 일족에 있다고 보고 궁궐을 습격했지.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민비는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어. 피난지에서 가슴을 졸이던 그녀에게 한 친구가 생겨. 자칭 관우의 딸이라는 무당이었어. 그녀는 ‘염려 마십시오. 마마는 모월 모일 환궁하십니다’ 하고 민비를 위로했는데 그게 신통하게 맞아떨어졌고 그녀는 환궁에 동행해 팔자를 고치게 되지.

이 관우의 딸이 말만 하면 민비는 무엇이든 들어주었어. 금강산 봉우리마다 쌀 한 섬과 돈 천 냥, 무명 한 필씩을 얹고 치성을 드린다고 해도 두말이 없었고 이 여자의 속삭임에 따라 신하들이 쫓겨나기도 했고 벼락 벼슬에 임명되기도 했지. 안효제라는 이가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고발했으나 고종은 그를 추자도로 귀양 보내버렸다. 이때 고종이 하는 말을 보면 민비의 독살스러운 기운이 여지없이 묻어난다.

“망령되고 고약한 말들은 비난과 헐뜯는 말이 아닌 것이 없다. 겉으로는 비록 무슨 문제를 들어 말하였지만 속으로는 사실 협잡을 부렸다.”

ⓒMBC 〈옥중화〉 화면 갈무리정난정은 천민 신분이었지만 정경부인이 되었다. 위는 MBC 드라마 〈옥중화〉의 한 장면.
어려울 때 도와줬다던 빨간 펜 선생님

권력자가 이 지경이니 눈치 빠른 신하들이 진령군을 어떻게 대했겠니. 한 신하의 말을 들어보자. “(안효제가) 말을 가리지 않았으니, 감히 기도를 드리는 문제를 어찌 무엄하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습니까?” ‘공자 왈 맹자 왈’깨나 외우고 그 어려운 과거를 통과한 인재들이 무당 앞에 머리 조아리며 의남매를 맺기도 하고, 심지어 “어머니로 모시겠나이다” 납죽 엎드리기도 했어.

그로부터 10년 뒤 종두법의 보급자로 유명한 지석영이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라고 고발하고 있으니 민비를 등에 업은 진령군의 호가호위가 얼마나 사악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어. 그러나 전혀 그 사정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지. 바로 민비였어. 아마 그녀는 을미사변 때 칼을 맞고 죽을 때까지도 진령군을 부르짖었는지도 몰라. 환궁 일자를 기가 막히게 맞힌 진령군은 민비의 죽음을 막지 못했지. 민비가 죽은 뒤 진령군도 오래 살지 못했어. 민비가 죽고 1년 뒤인 병신년(1896년), 한때 조선을 뒤흔들던 무당 진령군도 숨을 거뒀지.

그 후 두 번째로 찾아온 병신년, 아빠는 우리 목전에 들이닥친 환생의 ‘기적’ 앞에 온몸을 떨고 있다. 대통령이 “어려울 때 도와주었다”는 한 정체불명의 예순 살 여성이 대통령의 연설문부터 남북문제, 경제 문제, 공무원 인사 등 국가 기밀문서를 누구보다도 먼저 열람했다고 한다. 빨간 펜을 들고 수정도 하고, 재단을 설립해서 수백억원 돈도 모으고, 자기 단골 마사지 가게 원장을 그 이사장에 앉혔다는 의혹도 있단다. 그런 와중에도 대통령은 문제의 인물을 철석같이 믿었다는 정황이 드러난 거야. 도대체 뭘 어떻게 얼마나 도와줬기에 저 여자는 조선 말기 진령군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한민국의 비밀 실세가 될 수 있었으며,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민비처럼 눈 감고 귀 막은 채 “아직도 이 사람들이 남아 있어요?”라며 최순실에게 밉보인 공무원 찍어내기나 시전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나마 조선은 왕국이었다지만 민주공화국에 법치국가를 자처하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토록 참람하고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냐.

아빠는 철이 든 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부끄러웠다. 또 너희에게 이런 나라를 보여주는 게 소름이 돋도록 혐오스럽다. 윤회와 환생을 믿는 건 아니다만 아빠는 우리 앞에 추한 본색을 드러낸 멍청한 호랑이와 사악한 여우, 호가호위의 주인공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백발 스님처럼 지팡이라도 짚고 눈 지그시 감고설랑 한탄스러운 질문을 하고 싶어. “허허 아직도 쌓아야 할 악업이 남았는가. 어찌 한 생으로 모자라 환생까지 하여 이렇게 두고두고 한 나라를 두 번 망치시는 것인가.”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은 민비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자”라 불렀다. 오늘날의 ‘그분’에게는 어떤 형용사가 어울릴까. 아빠가 이 글을 쓰기 몇 시간 전 텔레비전에 나와서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정체불명의 여인으로 하여금 나라를 헤집게 만들었던 저분에게는 어떤 형용사를 붙여드릴 수 있을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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