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미국의 동영상 하나를 본 적이 있다. 해외에 파병되어 갔던 미군들이 휴가라도 나온 듯 군복 차림으로 어느 공항에 등장했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어나 박수를 쳐주며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었지. 그때 군인들의 표정은 참 감동적이야. 쑥스럽지만 자부심 그득한 미소를 띠면서 사람들에게 목례하고 악수를 나누는 모습은 참으로 당당해 보였단다. 그때 미군 병사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죽을 고비를 넘겼을 수도 있고 동료가 전사해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박수 앞에서만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을 거야. “그래 우리는 미합중국 군인이다.” 되뇌면서 발걸음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을 거야.

아빠는 이 동영상을 보면서 군복을 입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 군복이든 경찰복이든 소방관복이든, 제복을 입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을 대신해 힘겨운 일을 떠맡는 경우가 많아. 그들의 제복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단, 그러려면 하나의 키워드가 반드시 필요할 거야. 바로 ‘명예’라는 단어지.

ⓒ연합뉴스1960년 4월19일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 모습.
우리 현대사 속에서도 명예를 지킨 군인은 많았단다. 1950년 6월25일 남과 북 사이에 전면전이 시작됐어. 북한은 소련제 탱크와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일본과 싸우던 조선인 부대까지 가세한 정예 인민군을 보유하고 있었지.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38선을 돌파하고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어. 하지만 당시 국군 장병들이 겁쟁이라거나 무능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니었어. 일선의 병사들은 정말로 용감하고 명예롭게 싸웠다.

6월28일 서울 사수를 위한 최후 저지선이던 미아리 고개가 뚫리고 탱크가 동대문 근처까지 휘젓고 다니면서 서울의 운명은 결정됐어. 그런데 미아리에서 동대문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던 혜화동에는 서울대학교 병원이 있었단다. 그곳에는 서울 북부 전투에서 후송돼온 부상병이 가득했지. 병원은 1개 소대가 경비하고 있었어. 이미 국군 수뇌부는 한강을 건너갔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까지 피란 간 상황, 달랑 수십명인 소대원이 병원을 지켜낼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그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부상병과 환자들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해. 전투를 지휘한 소대장은 민씨, 선임하사는 남씨였다고 전해지지만 나머지 소대원들은 그 성도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아. 그 이름 없는 용사들은 국군의 명예를 드높여주었어.

그뿐이 아니야. 서울이 함락되고 퇴로가 끊긴 뒤에도 국군 대다수는 갖은 노력으로 한강을 건너와 전력을 재편성하고 인민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면서 대한민국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기게 되지. 그런데 여기에 합류하지 못한 소수 장병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죽어도 서울을 지키다가 죽겠다”라고 외치며 서울 곳곳에서 싸우다가 죽어갔다고 해. 그들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이 오늘날까지 보전됐다는 점에서 아빠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오마이TV 갈무리방송인 김제동씨가 “별 네 개 사모님을 아주머니라고 불렀다가 영창 갔다 왔다”라고 한 말을 두고 일각에서는 ‘군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난했다.
1960년, 이승만 독재 정권이 세계사에 길이 남을 부정선거를 자행하자 이에 항의해 학생들이 들고일어나고 시민들이 합세한 4·19 혁명이 일어났지. 미친 듯이 쏴대는 경찰의 총에 숱한 목숨이 스러져가면서도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이승만 정권은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했어. 군인들이 탱크와 함께 시내에 진주했지만 시민들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어. 이승만 정권과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시위대와 그들에게 쏘아댈 총알을 가득 채운 카빈총을 번득이고 있던 경찰 사이에 군대가 들어온 거야. 시위대 앞을 가로막은 군인들 앞에서 한 사람이 울먹였단다. “그냥 다 쏘아버리시오. 그럼 데모고 뭐고 없어질 테니.” 그러자 당시 맨 앞에 서 있던 소위 한 명은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해.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국민의 군대입니다. 국민을 쏘라고 하는 명령이 내려오면 돌아서서 아스팔트를 쏘겠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군대는 국민의 편이다. 만세.”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날 이름 모를 소위는 대한민국 군대의 명예를 대기권 위로 올려놓았어. 국군은 나라의 군대이지 정부의 군대가 아니며, 국민에게 충성하는 군대이지 통치자에게 굴종하는 군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자 헌법 정신인 민주주의를 지키는 군대이며 그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사실을 그 한마디로 증명한 거니까. 아빠는 그 군인에게 눈물 나게 감사한단다. 그리고 그 긍지 높았던 소위의 결연한 얼굴을 그리며 박수를 보낸다.

1979년 12월, 권력에 눈이 어두운 일부 군인들이 상관인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일으켰어. 그 주동자는 너도 익히 이름을 들었을,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부 실세들이었지. 그들의 명령을 받은 최정예 공수부대가 국방부에 쳐들어왔을 때 국방부 장관 노재현은 휘하의 경비 병력에게 국방부 사수를 명령했어. 그러나 언뜻 봐도 살기가 충만한 공수부대가 총을 난사하며 쳐들어오자 이미 기가 죽어버린 경비병들은 총을 버리고 손을 들고 말아.

하지만 제대를 석 달 앞둔 병장 하나는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자기 위치를 지켰어. 공수부대원들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으려 했고 병장이 지지 않고 그들에게 발길질을 한 순간 공수부대원들의 총구는 불을 뿜고 말았어. 광주 조선대학교 2학년 재학 중 입대했던 정선엽 병장이었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시답잖은 소리를 한 마오쩌둥의 중국이 아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선언했던 대한민국의 군인. 정 병장을 비롯해 군부의 정권 찬탈에 맞선 몇몇 장교와 장군들이 지키고자 한 것, 그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었고 동시에 군인의 명예였어. 힘을 쥔 자들이 국가를 농단하고 국민을 무시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신념이었어. 아무리 힘이 세고 우악스러운 자들이 몰려오더라도 내 자리는 내가 지킨다는 용기였어.

처음에 말했던 미군 동영상을 보면서 어떤 이는 미군은 저렇게 대접받는데 왜 국민들은 국군을 존경하지 않느냐며 장탄식을 하더구나. 네 오빠를 포함해서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고, 거의 5000만 국민 전부가 ‘군인 가족’인 나라에서 왜 그런 한탄이 나올까. 아빠는 방송인 김제동이 토크쇼 중 “별 네 개 사모님을 아주머니라고 불렀다가 영창 갔다 왔다”라고 한 말을 두고 ‘군인의 명예’를 들먹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이유를 알았어.

모름지기 명예란 스스로 잘난체한다고 드높아지지 않아. 책임을 완수하고 그를 인정받을 때 제복의 어깨에는 명예라는 이름의 견장이 달리는 거란다. 그래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않은 군복에는 명예가 따르지 않고, 책임을 저버린 사람들의 제복이란 죄수복보다도 못하게 되는 거란다. 군사 기밀을 팔아먹은 공군 참모총장보다도, 숭숭 뚫리는 방탄복을 납품받아 병사들에게 지급한 장교보다도, 군대에서 사람이 사람을 악마처럼 괴롭히다가 때려죽인 일을 두고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군 수뇌부보다도, 1만원짜리 USB를 무려 95만원에 사들이는 군의 희한한 구입 행태보다도, 해군 함정을 타고 사모님들이 유람을 즐기고 병사들의 서빙을 받으며 속옷을 바지에 걸치고 광란을 즐기는 행태보다도, 방송인의 말 한마디가 그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켰다면, 그래서 땅에 떨어졌다고 주장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대한민국 국군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일이 뭐란 말이냐. 방송인의 말 한마디에 추락할 명예 따위라면 땅에 파묻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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