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은 도널드 트럼프를 버렸다. 대선 유세 기간 내내 인종과 성차별, 반(反)이민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트럼프 후보는, 최근 노골적인 음란 발언이 담긴 테이프까지 폭로되면서 ‘사실상 끝났다’는 것이 지배적 관측이다. 2005년 녹음된 것으로 보이는 이 테이프에서, 트럼프는 한 방송 관계자에게 저속한 말투로 “당신이 스타라면 여자들은 자기들한테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내버려둔다”라며 낄낄거린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이 같은 상황을 도외시한 채 연일 진흙탕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더티 플레이(dirty play)’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화당 의원과 지도부까지 공격하고 나섰다. 지금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 때문에 대선과 동시에 치러지는 연방의회 선거까지 망치지 않을까 걱정한다.

ⓒAP Photo10월9일 미국 대선 2차 TV 토론에서 트럼프(왼쪽)는 클린턴에게 “내가 당선되면 특별 수사를 벌여 당신을 감옥으로 보내겠다”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지난 9월 한 달간은 막가파식 언행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부 경합 주에서는 지지율 반전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9월26일(현지 시각) 1차 TV 토론을 망친 트럼프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 대한 무차별적 인신공격을 재개했다. 심지어 10월9일(현지 시각) 열린 2차 TV 토론에서는, 클린턴의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 사용 스캔들을 들먹이며 “내가 당선되면 특별 수사를 벌여 당신을 감옥으로 보내겠다” 따위의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공화당 권력 서열 1위라고 할 수 있는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2차 TV 토론 다음 날 동료 의원들과 전화 회의를 한 뒤 “더는 트럼프를 방어하지도, 함께 유세하지도 않겠다”라고 말했다. 트럼프에 대한 공개적인 ‘폐기 선언’인 셈이다. 자신의 발언이 트럼프에게 치명타를 안기는 것은 물론이고 당의 내홍을 일으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작심 발언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음담패설 테이프로 부정적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연방 상·하원 선거까지 위태로워져서다. 〈워싱턴 포스트〉는 “라이언 의장의 선언은 트럼프가 대선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하원 다수당 자리를 유지하는 데 당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다”라고 해석했다.

현재 공화당은 상원 100석 중 54석, 하원 435석 가운데 247석을 점유한 다수당이다. 6년마다 의원 3분의 1을 교체하는 상원 선거의 경우, 올해 선거에서는 교체 대상 34명 가운데 무려 24명이 공화당 의원이다. 트럼프의 막가파식 언행으로 공화당 지지율이 계속 떨어진다면, 민주당에 상원 다수당 자리를 내줄 수 있다. 2년마다 선거가 치러지는 하원의 경우, 공화당이 59석을 더 갖고 있지만 트럼프 불똥 때문에 안심할 형편이 아니다. 실제로 선거 분석가들은, 공화당의 난맥상에 염증을 느낀 친(親)공화당 성향 유권자 가운데 5%만 투표장에 나오지 않아도, 대선은 물론 연방의회 선거까지 공화당이 패배하리라 내다본다.

선거에 직면한 공화당 의원들의 반발이 거센 것도 이 때문이다. 2008년 대선 후보를 지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포함해 40여 명에 달하는 상·하원 의원들이 트럼프에게 후보직 사퇴를 요구한 상태다. 하지만 공화당의 최고 권부 중 하나인 공화당전국위원회(RNC) 라인스 프리버스 위원장이 트럼프를 옹호하고 나섰다. 일부 의원들까지 라이언 하원의장의 발언을 해당 행위라고 강력 반발하면서 공화당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Reuter공화당 권력 서열 1위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2차 TV 토론 직후 트럼프에 대한 공개적인 ‘폐기 선언’을 했다.
트럼프는 당의 상황에는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다. 그는 10월11일 대표적 경합 지역인 펜실베이니아 주 유세에서 “당의 족쇄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식의 싸움을 할 수 있게 됐다”라며 공화당과 사실상 절연을 선언했다. 특히 라이언 의장을 가리켜 “나약하기 짝이 없고 비효율적인 지도자”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자충수와 공화당의 자중지란에 클린턴 측은 희색이 만면하다. 저명한 선거 예측 전문 웹사이트 ‘파이브서티에이트(five thirtyeight.com)’는 10월12일 현재 ‘클린턴 대 트럼프’의 승산을 86.7% 대 13.3%로 보았다. 비영리 단체인 공공종교연구소(PRRI)가 10월11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클린턴이 49%의 지지를 받아 38%에 그친 트럼프를 무려 11%포인트나 앞섰다. CNBC 방송은 2012년 10월 중순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가 상대인 밋 롬니 공화당 후보에게 고작 0.7%포인트 앞서고도 승리한 전례를 소개하며 “최근의 지지율 추이를 볼 때 올 대선은 이미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라고 예측했다.

수도 워싱턴 D.C.와 37개 주에서 이미 시작된 조기 투표에서도 클린턴의 승리를 예감할 수 있다. 〈뉴욕 타임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층인 히스패닉 유권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대표적 경합 지역인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와 올랜도에서 ‘부재자 투표지 요청 수’가 2012년에 비해 50%나 증가했다. 2012년 대선 당시, 공화당 롬니 후보가 압승을 거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도 민주당 우편투표 요청 수가 증가한 반면 공화당은 오히려 감소했다. 민주당은 대표적 경합 주들에서 40% 넘는 유권자가 11월8일 투표일 이전에 조기 투표에 참여하리라 본다.

트럼프가 꺼낼 막판 카드는 네거티브 공세

선거에 민감한 주식시장의 움직임도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 10월9일 2차 TV 토론 직후 CNN 여론조사 결과가 클린턴의 압승으로 나타나자, 다음 날 주가지수가 급등했다. 헤지펀드 ‘리버티 뷰 캐피털 매니지먼트’ 사장인 릭 메클러는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투자자들은 클린턴 당선이 트럼프 당선보다 시장을 예측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본다”라고 밝혔다.

문제는 대세가 클린턴으로 크게 기운 절망적인 상황에서 트럼프가 꺼낼 막판 카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트럼프는 음담패설 테이프가 폭로된 뒤 핵심 지지층 외의 표심까지 외연을 넓힌다는 목표를 사실상 접었다. 대신 클린턴에게 무차별 인신공격을 퍼부어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의 투표 참가율을 줄이는 데 총력을 집중할 방침이다”라고 보도했다. 즉, 대선일 막판까지 클린턴에 대한 네거티브 공격 수위를 한껏 높여나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클린턴의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성추문을 계속 들춰냄으로써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의 투표 의욕을 최대한 꺾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선거 분석가들은 트럼프의 막판 네거티브 전략이 큰 효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친(親)민주당 유권자들의 투표율이 다소 떨어진다 하더라도 트럼프가 골수 지지층 외에 백인 여성이나 고학력 백인 남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승산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전망한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