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이희진 지음, 소나무 펴냄
“남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이용했다’는 한마디면 충분한 셈이다. 이것만으로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이용한 놈은 끝장날 각오하라는 훌륭한 메시지다.” 이 책의 저자가 전하는 한국 고대사학계의 학술논문 심사에 얽힌 이야기다. 황국사관으로 찌들어 역사를 조작한 경우가 비일비재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삼국사기〉보다 더 믿는 것이 우리 고대사학계의 현실이라는 것.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를 더 믿어야 하는 이유가 걸작이다. 예컨대 일본의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해서 신라 왕의 항복을 받고 고문해 죽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고대 일본인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은 사실’이었기에 그 시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사건이 4세기 중반인 신공황후 때 일어났다는 것을 의심하기 힘들다는 이상한 논리다. 

한반도에 세워졌던 초기 국가의 성립 시기를 늦추려는 일본 학계의 노력에 우리 학계가 놀아났던 형편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다음은 이른바 한·일 역사공동위원회가 2005년에 내놓은 연구 보고서 내용의 일부다. “결국 신라는 4세기 후반 나물이사금 때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초기 고대 국가를 이룩한 단서를 잡았으나 고구려의 간섭 속에 이루지 못하고, 5세기 전반 눌지마립간 때에 와서 단위 정치체인 6부를 왕권에 종속적으로 연합하여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였다.”

저자는 한·일 역사공동위원회의 고대사 분과가 우리 고대사를 식민사학의 논리로 짜서 일본에 팔아먹었다고 질타한다. 고대사 분과에서 유달리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던 까닭을, 그들이 연구 성과라고 내놓은 꼴을 보면 짐작이 간다는 것. 이렇게 고대국가 성립 시기를 늦추려는 근본 이유는, 일본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있던 나라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한반도 남부 국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신라가 일본에 저자세 외교를 펼쳤다는 일본 및 우리나라 학자의 주장이다. 그런 학자들은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나온 관련 기록을 증거로 든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주장이 역사 연구의 기본 중의 기본인 사료 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일본서기〉 신공황후 9년 기록에는 (4세기 중엽) 신라가 일본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백제와 고구려의 왕이 일본에 항복했다는 내용이 있다. 4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힘을 감안할 때 코웃음밖에 안 나오는 조작된 내용이다.  

ⓒ연합뉴스‘건국절 법률 개정과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중단’ 촉구 시위 모습.
‘건국절’에 드리워진 식민사관의 그림자

광복 이후 우리 고대사학계를 장악한 인물들은 자신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이라 주장하면서, 반대편 역사학은 반실증적·반과학적인 것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저자는 그들의 역사학이 정말로 실증적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학자들이 배운 쓰다 소키치(1873~1961)의 한·일 고대사 체계란 실증사학의 탈을 쓴 황국사관에 불과하다. 그것은 〈일본서기〉의 일부 내용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전의 기록을 활용해 한반도 초기 국가의 식민성을 강조하는 그림 만들기였다. 이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철저하게 무시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한반도 고대국가 성립 시기는 수 세기 이상 늦춰져야 했다.

때로는 비분강개가 드러나기도 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좀 엉뚱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8월15일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주장대로라면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15일 이전의 역사는 무엇이 되는가? 고대국가 성립에 관한 식민사학의 그림자가 근대국가 문제에서도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으로 보이는 건 필자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가?

기자명 표정훈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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