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22일 금요일 밤, 콜롬비아 남동부 아마존 정글에서 게릴라들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렸다. 게릴라 지도부와 대원들이 소총과 수류탄을 내려놓고, 군복을 벗은 뒤에 민간복으로 갈아입었다. 대형 스크린이 세 개나 설치된 가설무대 위에서 음악 밴드가 레게 리듬을 연주하자 게릴라 대원들이 손을 흔들고 춤을 추었다. 이튿날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최고사령관인 로드리고 론도뇨가 게릴라 조직을 정당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중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게릴라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긴 전쟁을 끝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렇게 지구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반 이상이 일어난다던 나라 콜롬비아에 ‘10일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52년 만이었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1964년에 콜롬비아공산당(PCC)의 군사조직으로 창설되었다. 콜롬비아 정부군이 공산당 지지가 강했던 농촌을 공격하자 곳곳에서 농민들이 자위대를 만들었다. 그 자위대들이 모여 게릴라 군대를 창설했다. 이후 52년간 콜롬비아 농촌은 좌익 게릴라, 정부군, 우익 무장 세력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열대 저지대와 안데스 고원지대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게릴라는 전성기에 콜롬비아 영토의 40%가량을 통제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22만명이 죽고, 600만명이 피란민이 되었다.

ⓒAP Photo9월26일 콜롬비아 대통령(앞 왼쪽)과 게릴라 사령관(앞 오른쪽)이 평화협정에 공식 서명했다.
지난 9월26일 월요일, 콜롬비아 북부 카르타헤나에서 정부와 게릴라가 평화협정에 공식 서명했다. 그날 콜롬비아에는 평화의 상징들이 넘쳐났다. 대통령 부인은 손목에 작은 비둘기 문신을 했다. 대학생들은 폭탄으로 무너진 건물에 하얀 풍선을 매달았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부터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전 세계 지도자들이 평화협정에 지지를 보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중남미 국가의 대통령 10여 명 등 귀빈들은 직접 역사적 자리에 참석했다.

게릴라 최고사령관 로드리고 론도뇨는 처음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언어다”라면서 종전 의지도 재확인했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은 10월2일 국민투표에서 평화협정안에 찬성해달라고 호소했다. 마지막 절차인 국민투표를 통과하면 열흘간의 평화는 영구적인 평화가 될 것이다.

사실 산토스 대통령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 시대의 격언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그는 전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게릴라 캠프를 폭격해 게릴라 지도자를 죽였고, 반군 수를 3만여 명에서 7000여 명으로 줄였다. 그의 강경 진압 작전은 게릴라를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무려 4년간 게릴라와 치열한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평화협정안은 게릴라를 콜롬비아 사회로 편입시키는 로드맵이다. 평화협정에 따르면 게릴라를 정당으로 전환하고, 득표수에 상관없이 총 10석(상원 5·하원 5)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게릴라 대원들은 국제연합의 감독 아래 무장을 해제하고 사면과 형량 경감 혜택을 받는다. 정부 지원금을 받으며 민간인 생활을 준비하는 것이다.

한때 중남미는 ‘게릴라 대륙’으로 불렸다. 그때는 우파가 고문과 암살로 좌파를 산맥과 정글로 쫓아버리던 시절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게릴라 조직은 정당으로 바뀌었고, 게릴라들은 정치가로 변신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엘살바도르의 산체스 세렌 등은 모두 게릴라 출신 대통령이다. 과연 콜롬비아 게릴라도 이들 뒤를 따를 수 있을까?

10월2일 일요일, 드디어 콜롬비아 전역에서 평화협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놀랍게도 부결이었다. 반대 50.2% 대 찬성 49.8%. 차이는 0.4%포인트에 불과했다. 콜롬비아는 둘로 나뉘었다. 도시 지역에서 반대가 압도한 반면, 농촌에선 찬성이 강했다. 전쟁과 거리가 먼 지역에서는 반대가 거셌지만, 전쟁 피해가 큰 지역에서는 찬성이 높았던 것이다. 이 나라는 도시와 농촌, 교전 지역과 비교전 지역으로 뚜렷이 갈렸다.

ⓒAFP10월5일 평화협정 지지자들이 수도 보고타에 있는 대통령궁 앞에서 촛불시위를 벌이는 모습.
반대표의 결집은 놀라웠다. 찬성이 많은 지역보다 반대가 많은 지역에서 투표율이 높았다. 농촌 지주들이 앞장섰다. 2015년 현재 콜롬비아에서는 인구의 0.4%가 전체 토지의 절반가량을 소유하고 있다. 지주들은 전쟁 기간에 무력으로 땅을 늘려왔기 때문에 평화협정을 반대한다.

콜롬비아 혁명군의 악명도 크게 작용했다. 콜롬비아 혁명군은 민간인을 납치하거나 코카인을 밀매해서 자금을 조달해왔다. 피난과 이농으로 농촌에 청년들이 줄어들자 소년들을 게릴라 대원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국민의 공분을 샀고, 게릴라의 도덕적 정당성도 훼손되었다.

평화협정 부결운동을 주도해온 알바로 우리베 전임 대통령은 이런 점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게릴라들이 처벌도 받지 않은 채 국회의원이 되어 활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화는 소망스럽다. 그러나 평화협정 내용은 실망스럽다”라며 부결운동을 주도했다.

52년 만에 찾아온 10일간의 짧은 평화

그런데 국민투표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63%에 달하는 기권율이다. 52년 전쟁을 마감하는 매우 중대한 투표인데도 콜롬비아 국민들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찬성이 썩 내키지 않을 이유는 많다. 국민투표를 앞두고서야 희생자에게 사과하고 폭발물을 해체하겠다고 약속한 게릴라의 행태에서 진심을 찾기 힘들다. 또 인기가 매우 낮은 대통령이 게릴라 최고사령관과 나란히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어야 한다는 찬성파의 주장에 동조하기도 어렵다(산토스 대통령은 10월7일 201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극우파 전임 대통령 알바로 우리베는 게릴라들을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전쟁 기간에 벌어진 전체 민간인 살해의 88%는 오히려 극우 무장 세력과 정부군의 소행이란 점에 침묵했다. 즉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얄팍하게 정치적 계산이나 일삼으니 국민들은 모두 꼴 보기 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국민투표 부결로 52년 만에 찾아온 ‘10일간의 평화’도 끝이 났다. 그렇다면 다시 전쟁인가, 아니면 재협상인가? 새롭게 만들어질 협상 테이블에는 정부와 게릴라만이 아니라 부결운동 세력까지 한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콜롬비아는 무기를 내려놓을 타이밍을 두 번이나 놓쳤다. 중남미가 모두 민주화되던 1980~1990년대, 중남미에 일제히 좌파 정부가 들어서던 2000년대, 그 시기를 모두 허비했다. 지금 콜롬비아 게릴라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기자명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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