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 한복판에 낯선 인물이 등장했다. 야당과 여론의 비판을 온몸으로 감수하고 있는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상근부회장이다. 그가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인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출연금 모금에 앞장선 것으로 드러나면서 전경련과 이 부회장에 대한 의혹이 줄을 잇고 있다.

그는 해결사 노릇도 자임하고 나섰다. 9월30일 전경련은 잔여 자산 약 750억원을 하나로 합쳐 통합 재단을 출범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연일 이 부회장과 전경련에 대한 성토와 해체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재계 맏형이라 불리던 전경련의 최대 위기다.

직위는 부회장이지만, 이승철 상근부회장은 전경련의 실질적인 수장이나 다름없다. 상근부회장은 명예직인 회장을 대리해 실질적으로 전경련을 이끈다. 전경련 회장단의 독특한 구성 방식 때문이다. 전경련은 1961년 설립 이래 국내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협의체로 활동해왔다. 군사독재 정부와 협력하며 재벌 체제를 공고화했다. 자연스럽게 회장과 부회장은 대부분 현업 재벌 총수가 맡았다. 회장단 모두 ‘본업’이 있기 때문에 실무를 전담하는 사무국 대표가 필요했는데, 이 임무를 맡은 이가 상근부회장이다. 현재 회장 1인, 부회장 19인으로 구성된 회장단에서 유일한 ‘내근 부회장’이다.

ⓒ전경련 홈페이지 갈무리전경련이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인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출연금 모금에 앞장선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전경련을 두고 해체 의견이 나오고 있다.
상근부회장의 역할은 정관에도 명시되어 있다. 2011년 8월에 개정된 정관에 따르면, 상근부회장은 회장의 명을 받아 사무국을 통할하며(제11조 6항), 집행임원(전무·상무·상무보)은 회장 및 상근부회장의 명을 받아 사무국의 제반 업무를 분장 처리한다(제12조 3항). 법인 등기상으로도 전경련의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은 회장과 상근부회장뿐이다. 상근부회장에서 전무로 이어지는 라인이 사실상 전경련의 핵심이다.

상근부회장은 전경련의 두뇌이자 입이기도 하다. 재벌 총수인 회장이 자신의 기업에 미칠 영향 때문에 말을 가린다면, 상근부회장은 공개적으로 전경련과 회원사인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 정권과의 유착 혹은 갈등 관계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도 상근부회장이다. 2003년 1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당시 손병두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2003년 1월4일 평화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이제 우리나라에 재벌은 없다”라며 대통령 인수위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대기업 구조조정본부 해체, 상속세와 증여세 완전포괄주의 도입 등 새 정부에서 추진하려던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승철 상근부회장 역시 박근혜 대통령 취임 초반에 “(정부의 경제정책은) 규제 왕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라며 정권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연합뉴스정권과의 밀월 관계 의혹을 받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허창수 회장(오른쪽)과 이승철 상근부회장(왼쪽).
하지만 전경련과 박근혜 정부 사이 긴장관계는 이때뿐이었다.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났듯이 전경련과 박근혜 정부는 밀월 관계다. 여기에는 이승철 상근부회장의 독특한 이력도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전경련 상근부회장과 전무 자리는 기업이나 관료 출신 외부 인사가 초빙되는 경우가 많았다. 손병두(삼성그룹 출신) 상근부회장 이후로도 현명관(행시 4회·삼성그룹), 조건호(행시 7회), 이윤호(행시 13회), 정병철(LG CNS 고문) 등 외부 출신이 주로 전경련을 이끌었다. 2013년 당시 이승철 전무가 상근부회장으로 승진 발탁될 때 재계가 놀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20년 만에 등장한 사무국 출신 내부 승진자였다.

개인적으로 내부 승진 성공신화를 이뤘지만, 이승철 상근부회장이 이끌어갈 전경련은 이미 예전의 명성을 잃었다. 2010~2011년이 분기점이었다. 2010년 조석래 효성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전경련은 7개월간 회장직이 비어 있었다. 전경련 회장에 적극 나서는 이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현 허창수 회장(GS그룹)이 전경련을 이끌게 됐지만, 핵심 재벌 총수들은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2011년 3월 이후로는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2년 전부터 회장단 회의 결과도 ‘비공개’

외연이 점차 축소되자 이승철 상근부회장 체제는 더욱 비밀주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회장단 회의 비공개 전환이 대표적이다. 원래 한 해 다섯 차례(통상 1·3·5·9·11월) 진행하는 회장단 회의는 회의 직후 의결 사항을 공개적으로 발표해왔다. 발표문 자체가 현안에 대한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터라 여론의 관심도 컸다. 그러나 회장단 회의에 불참하는 재벌 총수들이 늘면서 2014년 6월부터는 회장단 회의를 비공개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정관과 유관 기관 역시 비공개 원칙을 세우고 있다. 현재까지 공개된 전경련 정관은 〈전경련 50년사〉에 실려 있는 2011년 8월 개정 정관이 전부다. 이후 정관 개정 이력, 현 정관 내용에 대해 전경련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홍보 부서도 전경련 정관 문서를 갖고 있지 않다. 정관 개정 이력도 알려진 바 없다”라고 말했다.

전경련은 민간단체라는 이유로 외부 견제 장치가 미흡하다. 자연히 연 700억원에 이르는 수입이 어디에 쓰이는지, 어떤 기관으로 흘러가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9월30일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에 이승철 상근부회장이 비상근 이사직에 올라 있으며, 이기동 전 동국대 교수를 한중연 원장으로 추천해 9월9일 이사회에서 의결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이 원장의 임명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였지만, 이 부회장이 한중연 이사를 맡고 있다는 점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전임 정병철 전 상근부회장 역시 퇴임 직전(2013년) 한국광고주협회 회장을 겸직해 논란이 됐다. 당시 정 부회장은 사석에서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되면 자동으로 맡아야 할 자리가 수십 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경련은 상근부회장이 구체적으로 어느 단체의 어떤 직책을 겸하는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보수적 경제연구소와 여당에서도 비밀주의에 빠진 전경련의 존속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0월4일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 싱크탱크였던 국가미래연구원(원장 김광두)과 진보적 경제 전문단체인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는 전경련의 자진 해산을 촉구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10월5일에는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기재위 국정감사에서 전경련 해체론을 꺼냈다.

실제로 전경련 위기는 허창수 회장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2월에 불거지리라 보인다. 이미 연임한 허 회장이 다시 연임을 시도하기에는 여론의 부담이 크다. 차기 회장 추대가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독이 든 성배’를 아무도 받지 않으려 한다면, 2010년과 같은 회장 공백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도 크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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