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라는 사람이 쓴 〈장미의 이름〉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어. 이 소설은 중세의 웅장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수도사 연쇄 살인 사건과 그 해결 과정을 주된 뼈대로 삼고 있어. 그런데 이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수도원의 원로 수도사였지. 그는 웃음을 악마로 보고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識者)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라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페이지에 독을 발라놓고 그 책을 읽는 수도사들을 죽였던 거야. (침을 발라 페이지를 넘겨야 했던 옛날 책의 특성을 이용하여) 그는 부르짖지.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정하는 악마의 선물이야!”

이 늙은 수도사만큼은 아니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기묘할 만큼 웃음을 경시하고 멸시해왔다는 생각이 들어. 아빠는 자라면서 “이빨 보이지 마라” 하는 핀잔을 자주 들었다. 즉 ‘실실 웃고 다니지 말라’는 거였지. 농담을 즐겨 하는 사람들은 실없다는 평에 시달려야 했고 웃음이 많은 여자는 바람기가 많다는 편견이 난무했단다. 요즘은 좀 달라진 것 같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아니 말을 바꿔서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쓸데없이 진지하며 현저하게 재미없다는 게 아빠의 개인적인 생각이야. 혹독한 식민지와 지옥 같은 전쟁, 그리고 진절머리 나는 가난과 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를 들여다보면 그나마 웃음의 샘이 말라붙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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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지난 8월27일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의 힘겨운 등줄기를 식혀주던 소슬바람 같은, 삐거덕거리며 마모돼가던 삶의 마디에 듬뿍 뿌려지던 윤활유 같은 웃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어. 코미디언들이었지. 네게는 개그맨이라는 표현이 익숙하겠지만.

며칠 전 원로 코미디언 중 한 분인 구봉서씨가 세상을 떠나셨어. 1926년생으로 향년 90세. 이분의 부음을 들으면서 아빠는 한 세대가 이렇게 떠난다 싶은 생각에 하염없이 먼 하늘을 바라봤단다. 고인은 물론이고 아빠가 어린 시절 그분과 함께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누비고 국민들의 배꼽을 빠지게 만들었던 코미디언들의 별 무리가 드리워졌기 때문이야.

우선 아빠는 어려서 서영춘이라는 코미디언을 참 좋아했어. 아마 너도 학교에서 공부 게을리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공부 좀 해! 배워서 남 주나?” 하고 호통 치는 걸 들은 적이 있을 거야. 서영춘씨는 바로 이 “배워서 남 주나?” 유행어를 남긴 분이야. 이분은 한국 최초의 래퍼이기도 했어. 이분이 요령부득 같지만 기막힌 운율과 음색이 살아 있는 랩을 읊으면 많은 사람들이 뒤로 넘어가며 웃어댔단다. “차이코프시키 동생 두리스 위스키 작곡 시장조 도로또 4분에 4박자/ 잔즈그 즈그즈그 즈그즈그 잔∼ (중략) 산에 가야 범을 잡구 물에 가야 고길 잡구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곱뿌(컵) 없이는 못 마십니다….”

이분은 미국의 찰리 채플린을 닮았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 콧수염 하나 턱 가운데에 박으면 언뜻 비슷하게 보이는 데다가 채플린이 영화 속에서 즐겨 보여주던 슬랩스틱 코미디, 그러니까 바보처럼 맞고 넘어지고 하면서 사람들의 웃음보를 폭발시키는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였거든. 그건 단순히 그분이 바보 흉내를 잘 내기 때문이 아니었어. 서영춘씨는 공연이나 녹화 전 가장 먼저 무대를 점검하는 사람이었어. 관객 처지에서 내가 어떻게 넘어지면 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지, 어느 쪽으로 넘어져야 하는지, 어느 정도 비틀거리다가 자빠져야 더 극적으로 보이는지를 면밀히 연구하기 위해서였지. 진짜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음악과 춤으로 단련된 그의 계산에 따른 것이듯, 서영춘씨의 연기도 치밀한 연구의 결과였던 거야.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어. 서영춘씨뿐 아니라 ‘비실비실 배삼룡’의 바보 흉내 연기로 유명한 배삼룡, 그리고 며칠 전 고인이 된 구봉서씨까지 모두 ‘한국의 채플린’이라는 찬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들 모두가 슬랩스틱 코미디의 달인이었다는 얘기야. 그런데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감춰져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훌륭한 코미디 장르이지만 당시 한국 코미디언들은 이것밖에는 할 수 없었단다. 구봉서씨가 언젠가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 “우리는 너무나 제약이 많아요. 신랄한 풍자란 상상할 수도 없지요. 정치에 대한 풍자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고 알아서 잘라버리지요.” 정치뿐이 아니었어. 의사든 변호사든 교수든 기업가든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코미디의 대상이 되는 걸 못 견뎌 했고 거센 항의로 가로막았지. 결국 코미디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건 바보나 거지였는데 또 거지를 부각시키면 정부 부처에서 전화가 걸려왔어. “거 왜 선진 조국에 걸맞지 않게 거지를 등장시키는 거야?” 구봉서씨는 이렇게 고민해야 했대. “코미디에는 도둑놈만 나와야 되나?”

‘얼굴만 봐도 웃기던’ 구봉서씨가 비장해진 이유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 위에서 말한 서영춘·구봉서·배삼룡씨 등등이 총출동했던 한국 코미디의 전설이지. 그런데 〈장미의 이름〉의 원로 수도사가 ‘웃음’을 병적으로 증오한 것처럼 〈웃으면 복이 와요〉를 기이하게 혐오한 사람들이 있었어. 정부 관리들이었지. “억지웃음을 강요하는 유치한 언동, 애드리브에 의한 저속한 대화, 아동교육상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작희적(作戱的) 언행”을 피하라는 경고에 이어 1977년 모든 코미디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단다. 어느 명이라고 거역하겠니. 때는 바야흐로 정부에 반항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유신 시대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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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 제공1970년대 개봉한 영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포스터의 구봉서·배삼룡·서영춘씨(왼쪽부터).
이때 구봉서씨가 어떤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돼. 여기서 그는 동료 코미디언들의 여망을 등에 업고 호소했단다. “택시 하나가 사람을 치여 죽였다고 택시를 다 없앨 수 있습니까.” 온 국민이 그 얼굴만 봐도 웃음을 터뜨리던 코미디언 구봉서의 그때 얼굴은 얼마나 비장했을까. 얼마나 절절했을까. 그 간절함이 통했는지 ‘1개 방송사 1코미디 프로그램’으로 규제가 완화되어 코미디 프로그램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해.

웃음을 경계하던 사회, 웃음의 가장 큰 원천일 풍자가 조선 시대 탈춤 패만큼도 허용되지 않았던 대한민국에서 코미디언들은 어떻게든 국민에게 웃음을 주려 발버둥 쳤고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한국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고된 일상을 잊었단다. 돌아보면 그분들은 천상 웃음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 서영춘씨는 환갑도 안 된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하루는 후배가 문병을 왔어. 서영춘씨가 후배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하니 후배는 “아이고 죽지 못해 삽니다” 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흔히 내뱉는 넋두리를 했는데 서영춘씨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해. “이놈아 나는 살지 못해 죽는다.” 듣는 사람들은 파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릴 말장난이었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죽음을 앞둔 코미디언의 서글픔이 가슴을 적셔오지 않니. 바로 이런 게 구봉서씨가 얘기한 코미디의 진수였을 거야. “웃음이 깔려 있는데 그걸 딱 제치면 슬픔이 나오는 것, 그게 코미디예요.” 그렇게 하고 싶은 코미디를 마음껏 하지 못했던, 그러나 너무도 고마운 웃음을 주었던 코미디언 1세대는 이제 추억을 넘어 역사의 장에 거의 들어갔어. 구봉서씨는 돌아가시면서 자신이 꽃미남 시절 출연했던 명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명대사를 읊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재미있게 말하면 너희들은 웃었지. 슬플 때에도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슬프겠지.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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