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끝났다. 근대 올림픽이 1896년에 출범했으니, 그 역사도 올해로 120년째를 맞는구나. 20세기의 그 파괴적인 전쟁과 냉전, 이에 얽힌 온갖 사건·사고를 거치면서도 ‘평화의 제전’이 유지되어온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은 올림픽 정신의 정수라 할 명언을 남겼어. “올림픽의 진정한 뜻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해서 평화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는 데 있다.”

감동적이지만 참 지키기 힘든 말이야. 죽이고 살리는 전쟁을 치른 나라의 젊은이들끼리 맞붙는 자리에서 “참가에 의의가 있다”라고 외쳤다가는 봉변만 당하게 될 거다. 한·일전처럼 ‘저놈들에게만은 질 수 없다’며 싸우는 경기 또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야.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 아빠는 배구 선수 김연경의 팬이 됐다. 원래 김연경 선수가 세계 최고의 배구 선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지고 있건 이기고 있건 스파이크를 성공시키면 그 큰 입을 시원스럽게 벌려 환호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던지…. 또 192㎝ 키의 그녀를 비롯해서 다들 아빠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보자니 까마득한 옛날 생각도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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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체육회 제공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여자 배구팀 선수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혜정 선수.
한국이 올림픽에서 최초의 금메달을 딴 건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였다. 한국의 ‘철천지원수’이자 ‘지면 죽는다’ 수준의 경쟁자였던 북한은 4년 전의 뮌헨 올림픽(1972년)에서 첫 출전으로 단번에 금메달을 움켜쥔 바 있었지. 더욱이 몬트리올에서도 일찌감치 금메달을 확보했다. 그러나 한국은, 몬트리올 올림픽까지 여덟 번이나 출전했지만 ‘노 골드’ 상태였어. 발을 동동 구르던 한국은 몬트리올 올림픽 폐막 하루 전 열린 레슬링 경기에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서 그제야 어깨를 편다.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인데 이 금메달 소식은 정말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던 사건이었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소원을 묻자 양정모 선수는 “운동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는 학교”라고 대답했다.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학교를 설립하라고 지시했고, 그해가 저물기 전 학교 하나가 뚝딱 만들어져서 개교했다. 오늘날의 한국체육대학교야.

이 양정모의 쾌거에 맞먹는 대접을 받은 선수들도 있었다. 동메달을 딴 여자 배구 선수들이었지.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메달이었어. 당시 여자 배구팀의 평균 신장은 170㎝. 다른 나라 선수들에 비해 10㎝는 작았지. 한국의 레프트 주 공격수(김연경 선수의 바로 그 자리)를 맡았던 조혜정 선수의 키는 더군다나 164㎝였어. 어린 나이였지만 아빠는, 아나운서가 ‘키는 작지만’을 연발하는 가운데 손바닥만한 흑백텔레비전 안에서 죽을힘을 다해 점프하고 때리고 받아내던 여자 배구 선수들의 눈물겨운 분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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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네덜란드와의 8강전에서 득점 후 환호하는 김연경 선수(오른쪽).
당시 한국의 레프트 공격수 조혜정은 준결승전을 앞두고 심한 무릎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조혜정 선수는 하릴없이 얼음찜질을 하다가 열심히 훈련 중인 후배 백명선 선수에게 실없이 물었다고 해. “너는 메달 따서 연금 나오면 뭘 할 거니?” 그때 백명선 선수의 답이 조혜정 선수의 가슴을 턱 막히게 했어. “언니, 저 동생이 여섯 명인데 학비를 제가 대야 해요.” 이 말을 들은 조혜정은 의사의 만류에도 준결승전 출전을 자청했어. 무릎이고 뭐고 간에, 저런 후배의 사정 앞에서 무심하다면 대한민국 ‘언니’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몰라. 조혜정 선수는 준결승전에서 악전고투했지만 무릎을 절룩이며 교체되고 말았고, 한국 팀은 패배했다. 남은 건 헝가리와의 동메달 결정전. 당시는 세트당 15점제였는데, 1세트를 내주고 2세트도 9대2까지 몰려서 동메달도 날아가나 싶었다. 그런데 홀연 뛰어올라 기적 같은 맹타를 휘두르는 선수가 있었어. 백명선이었지. 동생 여섯 명을 짊어진 어깨에서 터져 나오는 강스파이크는 그 세트를 뒤집어버렸고 사기가 오른 한국 팀은 세트스코어 3대1로 동메달을 땄다.

마흔네 살의 골키퍼 오영란의 투혼

이번 올림픽에서 아빠가 열렬히 응원했던 여자 선수가 또 한 명 더 있다.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오영란 선수. 1972년생 나이 마흔네 살이다. 네 고모 나이랑 같아. 아빠는 한국 팀 경기 실황 중계를 보고 나서야 오영란 선수가 골문을 지키는 걸 알았어. “도대체 언제 적 오영란이냐.” 아빠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너도 잘 아는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드라마를 만든 골키퍼가 오영란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했지.

아빠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핸드볼 대표팀이 벌인 마지막 경기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한국 팀은 3-4위전에서 동메달을 거의 확보했다. 그런데 감독이 작전타임을 부르지. 의아해하는 선수들 앞에서 감독은 작전 지시가 아닌 선수 교체 명령을 내려. “성옥이, 영란이, 정호, 정희, 순영이 나가라.” 그들은 모두 30대 중반 선수들이었어. 베이징 올림픽이 ‘마지막 올림픽’으로 남을 것이 거의 확실했던 노장들이었지. 이어지는 감독의 말도 충격적이었다. “너희들(후배들)이 이해해. 이건 선배들 마지막 경기야.”

치열한 경기 끝에 거의 탈진 상태로 벤치에 앉아 있던 오성옥 이하 30대 중반의 선수들이 코트로 뛰어 들어가던 그 뒷모습을, 아빠는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으로 기억한다. ‘저 무대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고 꾸중과 호통과 때로는 욕설까지 들어가며 바닥에 나동그라져야 했을까’ 생각하니, 아빠가 그들과 함께 코트를 같이 뛰며 어깨를 두드리는 망상까지 일더구나. 어떻게든 “고생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라고 말해주고 싶었거든.

그동안 한국 여성들은 각종 구기 종목 대회에서 남성들을 월등히 능가하는 성적을 올려왔어. 여자 배구는 동메달, 여자 농구는 은메달, 핸드볼은 금메달을 두 번씩이나 목에 걸었거든. 남자 축구는 수십 년 만에 동메달 하나 땄는데 말이지. 하지만 요즘 아빠는 앞으로 메달 안 따도 좋고, 어디 가서 1등 안 해도 좋으니 꼭 해결되면 하고 바라는 문제가 생겼어. 일부의 저질스러운 남성 지도자들이 합숙훈련 등 격리된 장소에서 팀 여자 선수들을 성적으로 폭행하거나 괴롭히는 사건을 일으켜왔다는 뉴스 때문이야.

태극마크 달고 온몸이 부서져라 뛰면서 우리를 환호하게 했던 여자 선수들, 그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훌륭한 지도자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각 협회는 이 음습하고 암울한 범죄의 늪을 밑바닥까지 파헤쳐, 짐승보다 못한 파렴치한들을 깡그리 도려내고 처벌해야 할 거야. 합숙훈련 같은 과거의 유물도 제발 좀 이제 걷어치웠으면 좋겠어. 감독에게 누군가 끌려 나가는 일을 막기 위해 서로 팔을 묶고 잤다는 여자 선수들의 증언을 들으며, 아빠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단다. 어떻게 개만도 못한 그런 인간들이 사람을 지도한답시고 발발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여기서 하나 더 생기는 의문. 1976년 몬트리올의 영웅 조혜정·백명선 그리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 농구 은메달의 주역이며 한국 여자 농구의 전설인 박찬숙, 여자 핸드볼의 숱한 금메달리스트들이 지도자로 명성을 날렸다는 얘기는 왜 들어본 적이 없을까?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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