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신문 연재 칼럼에서 격조를 기대할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립다. 첨예한 정치적 사안을 논하는 글에서도 문화적 식견이 묻어났다. 어떤 것을 치열하게 비판하더라도 그것의 처지를 한 번쯤은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넘어갔다. 그러나 최근 신문 칼럼은 매체 또는 칼럼니스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너무 빤한 내용이라 읽어볼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이렇게 삭막해진 우리 신문 칼럼계(?)에 단비처럼 내려온 서경식 교수의 칼럼을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일상적 감수성이 펼쳐지는가 싶으면 20세기 비극적 역사에 대한 성찰과 만날 수 있고, 항일 투쟁 같은 무거운 주제로 들어가는가 싶으면 어느 사이 그것이 현대 미술사의 주제와 만난다. 주제가 다양하다는 뜻에서 서 교수의 글은 잡문(雜文)이라 하겠지만, 그 잡문들의 갈피와 울림은 결코 잡스럽지 않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말에 능치 못한 재외동포 2세나 3세들에게 왜 우리말을 잘하지 못하느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재외동포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근본적인 최초의 언어, 즉 모어(母語)가 한국어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통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서경식 교수의 모국어에 대한 자의식은 모어가 일본어이기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개인 체험에서 서 교수는 같은 민족 중에도 다른 모어를 지닌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여러 모어를 지닌 ‘코리안 디아스포라’(離散)들까지 포함하는 새롭고 유연한 민족의 틀을 구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 교수가 우리나라 방송에서 일본어로 말하는 것은 결국 조국의 동포들을 향해 모어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었던 것.

예술에서 사회 표정과 역사적 풍경 읽어내

 

서경식 교수

 

서 교수는 국내 은행이 발행한 신용카드가 있으면 가능하다기에, 적지 않은 액수의 강제성 정기예금을 담보로 들고 많은 시간을 들여 카드를 만들었다. 신용카드를 들고 휴대전화 가게에 가니 이번에는 재외국민 국내 거주신고증 번호가 필요하단다. 신용카드 발급이든 휴대전화 가입이든 ‘국민’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기준이고, 그것은 주민등록번호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번호가 없는 사람은 신용할 수 없는 이로 분류되어 부당한 노력과 비용, 심지어 굴욕까지 감수해야 한다. 국적 없는 자에게는 인권도 없다는 논리, 요컨대 근대국가의 반(反)인간적 제도의 본질이 바로 주민등록제도에 담겨 있다.

서 교수의 글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예술인데, 특히 예술에서 사회 표정과 역사의 풍경을 읽어내는 징후적 감상법(?)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예컨대 서 교수가 본 중국 현대미술의 특징은 유럽(특히 독일)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자기 부정의 감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일본 현대미술에는 서양에서 수입한 미학·미의식과의 불철저한 갈등이, 한국 현대미술에는 일본을 거쳐 수입된 서양 근대 미의식과의 굴절된 갈등이 있다. 그러나 중국 현대미술에서는 전통적 미의식과 현대의 최첨단 미의식이 근대라는 시대를 생략한 채 바로 이어져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현대미술의 특징이 중국 자체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수상록, 칼럼집, 산문집 따위의 책은 한 번 읽고 마는 책이라는 선입견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서 교수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오래도록 가까이 두고 벗 삼기 좋은 글과 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다.

기자명 표정훈 (출판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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