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일병탄 조약 체결 직후 서울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조선총독부 관리와 이완용 등 매국 조약 추진 주모자가 고종과 순종을 앞세워 기념 촬영을 했다.

우리 사회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이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과연 현실은 어떨까. 〈시사IN〉은 이 속설이 믿을 만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 실상을 직접 들여다보기로 했다.  
조사 범위는 매국 조약 체결 등에 가담해 그 대가로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하사받은 매국형 친일파 10여 명과 그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또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의 국회 격이라 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참의를 지낸 상당수 친일파 후손도 살펴보았다. 대표적 친일파 명단을 놓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족보를 추적해 확인 가능한 후손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독립운동가의 경우는 임시정부 요인과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한 33인 대표,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민족의 선각자들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20~25쪽 딸린 기사 참조).

결론부터 말하면 3대 이상 흥한 ‘대표 친일파’ 후손은 ‘대표 독립운동가’ 후손보다 훨씬 많았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잖은 친일파 후손이 사회 각계에 포진해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선 매국 조약 체결 등으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파부터 살펴보자. 구한말 군부대신으로 을사늑약을 조인하고, 1910년 한·일 병탄 조약 체결에도 간여한 을사오적 이근택의 집안은 대표 친일파 가계로 통한다. 그의 형 근호와 동생 근상이 함께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는데 습작자까지 합치면 조선 귀족을 6명 배출한 집안이다. 이 때문에 일제 식민지 지배 당시에도 독립지사들은 이근택 5형제를 ‘5귀’라 부르며 지탄했다.

1910년 한·일병탄 뒤 일본 정부에서 훈1등 자작을 수여받은 이근택은 작위를 아들 창훈에게 습작했다. 창훈의 두 손자는 광복 후 교육 분야에 진출해 활약해왔다. 1998년 세상을 뜬 맏아들 이상우씨는 공주대 총장을 역임했고, 동생은 현재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도 1910년 한·일병탄 조약 체결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아 매국형 친일파로 분류된다. 그의 후손은 2005년까지 선대의 친일 재산을 되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9건 낸 적도 있다.

교육계에 뿌리 내린 ‘자작 민영휘’ 후손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은 친일파 중 교육 분야에 뿌리를 내린 또 다른 집안으로는 ‘자작 민영휘’ 후손을 꼽을 수 있다. 구한말 조선왕족이던 민영휘는 한·일병탄 직전 일제의 조선 병합을 지지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친일 매국 단체 간부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했다. 그 공로로 병합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매국공채 5만원을 받았다. 초기에 관직을 이용해 모은 재물을 불려 일제 강점기 조선 최대 갑부 반열에 올라섰다.귀족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자본가로 변신한 민영휘는 일제하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분류된다.
 

ⓒ시사IN 백승기친일 매국단체 간부로 한·일병탄을 지지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가 세운 휘문의숙(휘문고) 교정에 세워진 민영휘 동상.

민영휘의 후손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자리한 휘문고교를 상속받았다. 민영휘의 증손 민덕기씨는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풍문여고를 세웠다. 학교법인 휘문의숙은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인기씨가, 풍문학원은 고손자인 민경현씨가 각각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휘문고 교정에는 민영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른 후손의 사회 진출도 화려한 편이다. 막내 아들의 장남인 민병도씨는 제일은행장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민병도씨의 장남 민웅기씨는 텔레비전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로 유명한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 유원지를 소유하고 있고, 둘째 아들도 기업체를 경영한다.

민영휘의 후손은 광복 뒤 이승만 정부에서 휘문의숙을 세운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민영휘를 친일파로 분류하는 데 불만이다. 그러나 일제 때 조선총독부도 교육 관련 표창장을 줬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사업 진출이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1907년 대한제국 군부대신을 지내다가 한·일신협약 체결로 군대 해산에 앞장선 이병무는 ‘정미칠적’으로 분류된다. 해산된 군대가 의병을 일으키자 강경 진압했던 이병무는 한·일병탄 때는 시종무관장으로서 병탄 조약 체결에 협조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병무의 자작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은 이는 입양 아들 이홍묵이다. 이병무의 증손자 이진씨는 5공화국 때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노태우 정부 초기 국무총리 비서실장과 환경처 차관을 역임한 그는 현재 웅진그룹 환경경영담당 부회장이다. 그는 대학과 기업을 오가며 경제와 환경의 통합을 강조하는 ‘친환경 경영체제’ 주창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경술국적’ 민병석 아들, 대법원장 지내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 가담해 ‘경술국적’으로 불리는 민병석은 이완용과 처내종 간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깊은 교분 관계를 맺었던 민병석은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쓰러지자 장례 조문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한·일병탄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다섯 차례에 걸쳐 역임한 대표 친일파였다. 큰아들 홍기씨는 민병석의 자작 작위를 세습했고, 둘째 아들 복기씨는 일제 때 경성제대 법과를 나와 식민지 사법부에 진출했다. 민복기씨는 집안의 친일 행적과 상관없이 정부수립 후 제 5·6대 대법원장을 맡는 등 법조계의 거물로 활약하다가 지난해 작고했다.

민복기의 세 아들 중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장남 민경성씨는 일본계 기업체 사장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 민경택씨는 서울지법 판사, 서울지검 검사 등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다 작고했다. 서울대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을 나온 셋째 민경삼씨는 기업인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으로 조인을 총괄했던 박제순은 1910년 내부대신을 맡아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도 앞장섰다. 그 공로로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됐다. 박제순의 아들 박부양은 중추원 서기관이 되었고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과 나란히 조선 귀족 모임인 동요회 이사를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의 아들 박승유씨는 서울대 음대와 미국 남가주 대학 음대를 졸업한 뒤 성악가로서 강원대 음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선 왕족의 종친 가운데도 구한말 귀족 작위를 받고 식민지 지배에 적극 협력한 사람이 있다. 이해승이 그런 경우다. 이해승은 한·일병탄 후 21세에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16만2000원을 받았다. 종친 가운데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등 적극 친일에 나선 이해승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끌려갔지만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풀려났다. 그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씨는 현재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 힐튼 서울호텔 회장 겸 동원 INC 회장이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지난해 이해승이 친일 대가로 경기도 포천에 조성한 토지 약 200만㎡(시가 300억원대)를 국가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매국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파 후손 가운데는 멸문한 집안도 있다. 대한제국 법무형사국장으로서 명성황후 폐비 조처를 주도해 시해 사건을 돕고 10년간 일본으로 망명한 조중응이 그런 경우다. 일본에서 돌아와 이완용 내각 농상공부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조중응은 그 공로로 자작 작위와 은사금 10만원을 받았다. 이후 중추원 고문을 맡아 친일에 앞장선 조중응은 정실부인을 서울에 두고도 일본 여성과 도쿄에서 따로 결혼해 슬하에 자녀를 뒀다. 자식이 없던 서울의 정실부인은 양자를 입적했지만 대가 끊겼고, 대신 일본 부인과 자녀가 조중응 사후 작위와 재산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러면 매국형 친일파 중 당대에 쌍벽을 이루며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은 어떻게 지낼까.
 

식민지배 체제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친일파는 동포를 신사참배(위) 대열에 끌어들이는 데도 앞장섰다.

구한말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은 병탄 후 중추원 고문으로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았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일선 동화의 결실을 손상하는 경거망동과 황당무계한 유언 선동을 중지하라”고 만세운동 비난 담화를 발표해 그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작했다.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한 후 귀족 작위와 재산은 손자 병길이 습작했다.

이병길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완용의 직계 종손인 이윤형씨가 상속권자다. 일제 때 일본인 고위 관료 자녀의 교육기관이던 경성제1사범대 부속학교를 거쳐 동성고교와 홍익대를 나온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 말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발탁으로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 뒤 17년간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에 뛰어들어 한때 승소 판결로 수십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한편 이완용의 셋째 손자(이병길의 동생)인 이병주씨는 1962년 9월21일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일본 정부에 생활 보장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귀화시키고 환대했다. 일본에 귀화한 이병주의 아들 이석형씨는 1979년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있던 이완용 부부의 묘를 파내 화장해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일왕이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가 이 관 뚜껑을 인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전달해 한동안 역사 자료로 소장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이 소식을 듣고 내려와 원광대 총장을 설득해 가져다 태워버린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친일 사학자라고 비판받던 고 이병도 박사는 이완용과 우봉 이씨 집안 친척이다. 고 이병도씨의 두 손자가 현재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과 이건무 문화재청장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의 오랜 땅찾기 작업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국가 귀속 조처로 현재는 주춤한 상태다.

송병준 후손, 집요하게 ‘땅 찾기’ 나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매국노 송병준은 구한말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한·일병탄 때는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 총재 자격으로 병탄에 앞장선 인물이다.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왕실재산조사위원장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대장 수천만 평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세겨넣은 송병준은 1925년 뇌일혈로 숨졌는데, 재산과 작위는 아들 송종헌이 물려받았다. 송종헌 역시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국적 세도가로 행세했다.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친일파 이해승의 후손이 운영하는 그랜드 힐튼 서울 호텔.

그의 아들 송재구는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뒤 1930년 홋카이도에서 ‘조선목장’ 약 2640만㎡를 경영했다. 광복 후 송재구는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 99칸짜리 저택과 전답을 긴급 처분한 뒤 서울로 피신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9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송재구의 아들이 바로 송돈호씨로 서울 역삼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인천·경기·강원 등지에 걸쳐 있는 송병준 명의 토지 상속소송을 주도하며 각종 사기 사건을 일으키다가 2007년 4월 구속됐다. 올해 초 보석으로 나온 송돈호씨는  최근 헌법재판소에 친일재산 특별법 위헌소송을 냈다가 기각당하는 등 여전히 송병준 땅 찾기에 집요하다.

친일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받은 매국형 친일파 후손보다 광복 후 사회·경제적으로 더 강고한 기득권을 구축한 친일파 후손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그룹이 그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참의는 1910년 한·일병탄 직후부터 임명되기 시작해 광복 때까지 70여 명이 거쳐갔다. 1910년 10월 초대 참의 임명자는 종신직이었지만 1921년부터는 3년 임기로 일제 식민지배 공헌도에 따라 돌아가며 역임했다. 오랜 친일 행적이 쌓여 공로를 인정받아야 참의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로 분류된다.

호남 지방의 대지주였던 김연수는 일제 때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방직을 경영했다.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한 그는 1935년 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경성방직 사장 직함과 함께 수록돼 있다. 1940년 중추원 참의를 맡은 김연수는 태평양 전쟁 때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면서 군수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기간 중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국민의용대 등 친일 단체 간부로서 각지를 돌며 학병 지원 연설을 많이 벌였다.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난 김연수는 1961년 전경련의 전신인 전국경제협의회장을 맡는 등 재계 원로로 행세했다.

김연수는 7남6녀를 두었는데 장남 고 김상준은 삼양염업 명예회장, 차남 고 김상협은 16대 국무총리를 지내고 작고했다. 3남 김상홍은 현 삼양사 명예회장, 5남 김상하는 삼양사 회장을 맡고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은 신체시로 이름을 알린 육당 최남선도 중추원 참의 출신이다. 3·1운동 때 문화계 대표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은 그 후 변절해 일제 식민사관을 유포하던 어용단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최남선 역시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면했다.
최남선의 장남 최한웅 교수는 서울대 의대 소아감염학 권위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남선의 맏손자는 피부과 전문의이고, 또다른 손자는 경기대 경영학부 교수로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사업가로 명성을 떨친 문명기도 참의 출신 친일파로 분류된다. 제지업과 수산업, 금광 개발에 뛰어들어 부를 쌓은 그는 태평양 전쟁 때 국방헌금을 냈다. 아울러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해 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이며 가미카제 특공대를 옹호하는 친일 활동을 폈다. 또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함대를 물리치기 위한 일제 해군 ‘헌함운동’도 벌이며 앞장서 자기의 광산을 일제에 기부했다. 이런 공로로 1941년 중추원 참의가 됐다.
그의 맏손자인 문태준은 서울대 의대와 미국 토머스제퍼슨 대학원을 수료한 뒤 7대부터 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현재 남평 문씨 대종회장이다.

‘친일 내력’ 노출되는 정치권 진입 적어

정치인 가운데도 일제 시대 중추원 참의를 선조로 둔 이가 있다. 강릉 갑부로서 1936년 중추원 주임참의에 임명된 후 1941년 연임한 최준집의 아들 최돈웅 전 의원이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자기 회갑연을 취소하고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납부한 사실이 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일제에 충성했다. 그의 아들 최돈웅씨는 8·14·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2년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의 대기업 상대 불법 선거자금을 거둔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특사로 풀려났다.
재계의 거물 중 선대가 중추원 참의인 경우도 있다. 호남의 대표 친일 부호로서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된 현준호의 후손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1920년 호남은행을 설립해 대표를 지낸 현준호는 한때 민립대학 설립 등 민족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부터 지역 간척사업 이권을 따내는 등 일제와 밀착 행보를 보이며 민족운동과 결별했다.
현준호 역시 1935년 총독부 편찬 공로자 명단에도 올랐다.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나서 전쟁 지원을 역설했던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적극 가담했다.
 

ⓒ뉴시스친일재산조사위가 발족(위)해 활동 2년째를 맞지만 친일파 후손의 불복으로 난항을 겪는다.

현준호는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군에 피살됐다. 현준호의 후손은 대개 재계로 진출했다. 현우실업 대표인 현양래는 현준호의 손자이다. 현주호의 아들 고 현영원씨는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다. 현영원씨는 딸 넷을 두었는데 둘째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현 회장은 1955년생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76년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과 결혼해 현대가와 혼맥으로 연결됐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씨의 동생이라서 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기도 하다.
친일파 후손의 사회 진출에서 특징은 학계·경제계·관료·문화예술 분야에 몸담은 이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 진출도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다. 이는 후손이 선거운동 등에서 자기의 집안 내력이 노출되는 정치권 진출을 꺼렸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들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이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잘나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조상의 친일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 비해 친일파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요람’에서 근대적 교육 기회를 충분히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출발부터 남달랐다.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친일파 후손까지도 경제 형편은 유복한 편이었다. 아직도 조상이 친일 대가로 조성해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광복 63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국민의 관심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이재덕 인턴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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