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열림원 펴냄
서울대 불문과 60학번 김승옥이 있었고 서울대 독문과 60학번 이청준이 있었다. 둘 다 문학을 사랑했고 또 둘 다 가난했다. 1961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되었던 김과 이는, 김의 주도 아래 이런 작당을 한다. 우리 신춘문예에 한번 덤벼보자. 까짓 거, 한국문학 별 거 있냐. 붙는다. 붙으면 그 상금으로 다음 학기 등록을 하고 혹여나 떨어지면 미련 없이 입대하자. 아니나 다를까 김승옥은 1962년 1월1일자 한국일보에 등단작 〈생명연습〉을 실었다. 이청준은? 입대했다.

곱씹을 만한 데가 있는 에피소드다. 김승옥은 ‘까짓 거’ 하면서 번뜩이는 소설을 써내는 타입이었다. 쓰고 나서 통속소설이라고 자평한 게 걸작 〈무진기행〉이었고, 코믹한 거 한 편 써보자고 온돌방에 엎드려 쓴 소설이 동인문학상 수상작 〈서울, 1964년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청준은 달랐다. 그는 제대 후 1965년에야 〈퇴원〉으로 등단한다. 이청준은 까짓 거 하면서 써내려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중편 〈소문의 벽〉(1971년)과 장편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1985년)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소설가란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K처럼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목숨 걸고 뛰어다니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이니 그가 쓴 것치고 어느 하나 말랑말랑한 게 없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으레 골치 아픈 질문이 던져진다. 겹겹이 꼬여 있는 플롯을 따라가보면 만나게 되는 것은 상큼한 해답이 아니라 더 정교해진 애초의 질문이다. 작가의 성질이 고약해서가 아니다. 난제(難題)와 대면해 이를 의제(議題)로 끌어올리려는 치열한 노력 때문이다.

ⓒ뉴시스이청준이 던지는 윤리적 의제는 언제나 손쉬운 대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난제’를 ‘의제’로 끌어올리는 치열한 노력

전후세대와 4·19세대의 트라우마를 비교 탐구한 〈병신과 머저리〉(1967년), 말의 타락이라는 현상의 심층을 사회학적으로 파고들어간 〈언어사회학 서설〉 연작(1973년~), 헛것(유토피아)의 (불)가능성을 지적으로 성찰한 중편 〈이어도〉(1975년), 이와 유사한 주제를 장편의 규모로 박력 있게 형상화해 그의 대표작이 된 〈당신들의 천국〉(1976년), ‘말’이 아니라 ‘소리’의 세계를 탐구해 〈언어사회학 서설〉 연작과 짝을 이룬 〈남도사람〉 연작(1976년~) 등등, 1970년대 말까지 그가 이룩한 성채만 해도 그 폭이 이 정도다.

내 생각에 이청준 문학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은 ‘윤리적 상상력’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1980년대를 지배한 ‘정치적 상상력’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이고 1990년대를 풍미한 ‘일상적 상상력’보다 더 긴급한 어떤 것이다. 비근한 예로 최근 이창동 감독에 의해 〈밀양〉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단편 〈벌레 이야기〉(1988년)가 있다. 내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자가 종교에 귀의해 신의 용서를 받았다. 그렇다면 나는 뭔가. 나는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처참한 심정으로 어머니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자살을 택한다. 용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인가. 이 작가가 던져놓는 윤리적 의제는 언제나 손쉬운 대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면모는 지난해 말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작품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열림원)에서도 여전하다. 과거사 청산을 소재로 한 중편 〈지하실〉이 대표적이다. 선악을 가리기보다는 모두가 ‘가해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전언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런 논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진실’보다 ‘화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것이 확연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거친 선악 분별이 외려 ‘진실’을 훼손할 수도 있다면? 과연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논란은커녕 지루한 평화를 구가하는 한국 소설의 현황을 생각한다면, 이런 윤리적 상상력이 우리에게는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은가.    

7월31일에 선생이 영면하셨다. 소설이란 그저 재미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많아졌다. 요즘에는 작가도 더러 뜻을 같이하는 것 같다. 이청준 문학을 불태우지 않는 한, 소설은 이야기 이상이다. 나는 〈삼국지〉 세트를 앞으로도 구입할 생각이 없지만, 완간되면 30여 권에 이를 고인의 전집은 구비하려 한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피 끓는 영웅의 활극이 아니라 피맺힌 윤리적 상상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생전에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했다. 이제야 삼가 절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기자명 신형철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