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부터 시작된 시리아 주민의 시위는 불과 몇 달 사이 전국으로 퍼졌다. 정부군은 초창기부터 탱크와 포를 동원해 평화 시위를 진압했다. 민간인 사망자 수가 급증했다. 시리아군 소령 출신인 아하메드 카림 씨(36)는 “탱크와 장갑차와 함께 병력 3000여 명을 다라 지역에 투입해 주택과 주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무장 군인을 마을에 투입해 집집마다 수색했다. 지금도 가택수색 때 공포에 질린 시민의 눈이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군은 일부러 전화와 전기도 끊었다. 지붕 위의 저격수가 움직이는 모든 사람을 쏘았다. 다라 주민인 제이납 씨(30)는 “한 엄마는 아이들 빵을 사러 나갔다가 저격수의 총을 맞고 죽었다. 가족이 수습할 엄두를 못 내 4일 동안이나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되었다”라고 말했다.

무고한 시민에게 중화기를 발사하라고 지시한 장본인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었다. 민간인과 중무장한 군인이 벌인 전투의 결과는 뻔했다. 민간인은 속절없이 짓밟혔다. 시리아군은 아랍에서도 막강하기로 유명하다. 1948년 건국 이래 일어난 이스라엘과의 세 차례 중동전쟁에 모두 개입했다. 1980년대에는 레바논을 군정 통치했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다. 2010년 기준 정규군 병력 32만명에 예비군 31만4000명이었다. 시리아 헌법에는 “바트당이 시리아의 여당이며 따라서 바트당을 지키는 것이 바로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군 지휘관의 명령에 그 어떤 이의 제기나 논쟁도 허용하지 않는다. 명령 불복종은 곧 즉결 처형이다. 야전 지휘관에게는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할 권한이 있다. 이것이 시리아의 민주화 시위가 유독 잔인하게 진압된 이유다. 튀니지나 이집트 같은 다른 아랍 군대와 시리아군은 다르다. 다른 아랍 군대는 대개 영국군의 영향을 받아 최소한 무장 세력과 비무장 민간인은 구분한다. 군법은 무고한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한다. 반면 시리아 군대는 과거 사회주의 소련 군대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민간인이든 비무장이든 지휘관이 쏘라면 쏘아야 한다.

ⓒAP Photo 시리아 알레포 이자 지구에서 자유시리아군(FSA) 병사들이 정부군을 향해 총을 쏘고 있다.

군 내부 감시망도 살벌하다. 시리아 역사가 쿠데타로 점철된 까닭이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1984년 하페즈 대통령 시절 그의 친동생이자 방위대 지휘관인 리파트 알아사드가 쿠데타를 시도한 적도 있다. 철저한 정보 시스템을 가동한 덕에 친동생의 쿠데타 시도까지 적발할 수 있었다.

2011년 5월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가 한 아마추어 비디오 촬영가의 동영상을 방송에 내보냈다. 2011년 4월28일 촬영된 것으로, 시리아 남부 국경도시 다라의 시위 모습이었다. 믿기 힘들게도 군인들이 총격을 거부하며 탈영하고 있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시리아군 최초의 탈영이었다. 2011년 6월6일 압둘라자크 무함마드 탈라스 중위가 장교로서는 처음 탈영했다. 사흘 뒤 후세인 하르무쉬 중령이 탈영을 시도했다가 정보부에 체포되었다. 실패는 곧 죽음을 뜻했지만 탈영은 계속 늘어갔다. 어렵사리 연락이 된 모하마드 사피크 씨(32)는 시리아 정부군 육군 대위 출신이다. 그는 “진압하는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거의 대부분 일가친척이었다. 나는 총을 멘 채 시위대로 뛰어갔다. 뒤에서 지휘관이 나를 조준하여 쏘는 듯했지만 기적처럼 무사했다”라고 탈영 순간을 털어놓았다.

ⓒEPA 시리아 중부 하마 지역에서 군용차를 탄 정부군이 철수하고 있다.

2011년 8월, 시리아 정부군 출신 리아드 알아사드 대령이 탈영병을 규합해 ‘자유시리아군(Free Syrian Army:FSA)’이라는 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민간인 학살을 거부한 병사들이다. 시리아 정부군 육군 대위였던 사피크 씨는 북부 도시 홈스에서 비밀리에 자유시리아군 부대원을 모았다. 그는 “우리는 부대를 정비했다. 돈도 무기도 부족했지만 내 동포를 죽일 수 없고 무엇보다 국민이 등을 돌린 알아사드 정권은 퇴진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알아사드 대통령의 망명이나 죽음으로 사태가 마무리될 경우 군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고위급 장교들도 속속 동참했다”라고 덧붙였다. 자유시리아군은 불과 5개월 만에 4만명까지 불어났다.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는 자유시리아군이 총 37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17~23개 대대가 군사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무스타파 아흐메드 알셰이크 장군과 아페프 마흐무드 술레이마 공군 대령 같은 군 최고위층도 가담했다. 시리아 내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갈등이 무력 대 무력의 내전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AK 소총과 휴대용 로켓추진포로 정부군에 맞서

시리아는 부족국가 형태이다. 마치 신라 시대의 골품제를 연상케 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지배층은 대통령과 같은 종파인 이슬람 시아파의 지류인 알라위파이다. 이들이 요직을 독점한다. 알아사드에 반대하는 부족은 대부분 수니파이다. 그들이 탈영병을 숨겨주고 숙식을 제공했다. 은밀하게 시민의 도움을 받은 자유시리아군은 나날이 군대 꼴을 갖춰갔다. 알아사드 정부는 자유시리아군이 이슬람 극단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이므로 반드시 괴멸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이에 사피크 대위는 “정부가 자유시리아군 중에 알카에다 조직원이 있다고 흑색선전을 하는데 절대로 믿지 않길 바란다. 우리 내부에 외국인은 없다. 여전히 우리는 자랑스러운 시리아 군대이다”라고 말했다.

 

시민의 호의에 힘입은 자유시리아군의 활동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초창기 거점인 다라를 비롯해 홈스,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시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다마스쿠스 주변과 홈스에서 집중적으로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2011년 11월16일, 자유시리아군은 다마스쿠스 외곽에 있는 하라스타의 정보부 건물을 공격했다. 정부 시설을 노린 자유시리아군의 첫 번째 작전이다. 같은 날 새벽 2시30분께 다마스쿠스-알레포 간 고속도로에 있는 국내정보부 건물을 휴대용 로켓추진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새벽에 급습당한 정부군의 피해는 컸다. 각종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이 고작 소총과 로켓포가 전부인 자유시리아군에 패했다는 사실이 시리아 정부로서는 충격이었다.

2012년 1월21일 유명한 두마 전투가 벌어졌다. 두마는 다마스쿠스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14㎞ 떨어진 소도시로 알아사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했다. 대통령궁에서 겨우 10㎞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자유시리아군은 두마 전투에서 정부군을 밀어붙여 승리했다. 대통령궁 바로 코앞의 소도시를 빼앗기자 시리아 정부는 위기에 봉착했다. 자유시리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두마 전투 승리로 자유시리아군은 전 세계 뉴스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탈영병 부대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패기와 용맹만으로는 부족했다. 60만 대군과 4만의 싸움이었다. 무기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정부군은 탱크나 전투기까지 동원하는데 자유시리아군이 든 무기는 고작 AK 소총이나 휴대용 로켓추진포 정도였다. 자유시리아군을 지휘하는 사령관 리아드 알아사드 대령은 알자지라와 한 인터뷰에서 “자유시리아군은 경·중화기로 전투를 벌이는데, 이 무기들은 병사들이 탈영할 때 들고 나온 것이거나 정부군과 맞서 싸울 때 노획한 것들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무기 중 일부는 시리아 국내에 있는 정권의 깡패들로부터 돈을 주고 구입했다”라고 말했다.

자유시리아군의 최대 거점 도시는 시리아 제2의 도시이며 대표 상업도시인 북부 알레포다. 알레포는 북으로 터키 국경까지 자동차로 고작 한 시간 거리다. 터키로부터 보급을 받기가 용이하다. 알레포에는 장사를 해서 대대로 재력을 쌓은 사업가들이 많은데 그들은 시국 상황에 민감하다. 모하메드 씨(45)는 조상 대대로 알레포에서 스카프나 카펫 같은 것을 파는 직물가게를 한다. 부유한 그는 자유시리아군에 군자금을 제공한다. 모하메드 씨는 “전세가 자유시리아군에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알아사드에 반대하는 마음으로 군자금을 보낸다. 나뿐만 아니라 알레포에서 내로라하는 재력가 중 상당수가 자유시리아군을 후원한다”라고 말했다.

ⓒAP Photo 2011년 9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리아 반체제 인사들이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에 대항하는 ‘시리아 국가위원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부 수니파 국가들도 자유시리아군에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나섰다.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장관은 “시리아 반정부군은 스스로 무장할 권리가 있다”라고 선언했다. 사우디는 자유시리아군에 무기를 공급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카타르 국왕 역시 2012년 초 “시리아 학살을 막으려면 군사 개입이 불가피하다”라고 밝혔다. 아랍 국가 중에서도 자유시리아군에 무기를 공급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제프리 화이트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 군사분석가도 “자유시리아군은 병력과 무력이 점점 늘고 있어 향후 시리아 상황을 이끄는 추진력이 될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2011년 8월23일 반정부 그룹 대표가 터키에 모여 ‘시리아 국가위원회(Syrian National Council)’를 결성했다. 군대에 행정기관까지 생긴 셈이다. 이로써 시리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게 되었다. 시리아가 내전으로 치달으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알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 국민이 여전히 자신을 지지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시위대와 반군은 ‘외부 테러리스트의 폭동’이었을 뿐이다. 그는 테러리스트를 제거하기 위한 정당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국제사회에 선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제사회는 자유시리아군과 알아사드, 이 대결 구도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이슬람국가(IS)의 등장이 이 구도를 무참하게 깨버렸다. 내전이 5년 넘게 지속되며 알아사드뿐 아니라 IS까지 자유시리아군의 적으로 등장한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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