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어렸을 때 연말이 되면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실’이라는 것을 사라고 했단다. 거의 의무적으로 사야 하는 데다, 우표처럼 생겼으나 우표로 쓸 수는 없어서 불만스럽기도 했다. 다만 그 의도만은 좋은 일이었지. ‘결핵 퇴치 기금’을 모으는 것이었거든.

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고 판매하여 결핵 퇴치 기금을 마련하는 운동을 이 땅에 도입한 건 셔우드 홀이라는 의사였다. 조선에 온 선교사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의사가 된 후 평생을 이 나라 결핵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같은 다짐의 배경에는 어느 조선인 부부의 숭고한 삶이 자리 잡고 있었어.

바야흐로 나라의 문을 열어젖히고 근대의 파도가 밀려들던 조선 말 이후에는, ‘최초’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 허다하게 양산되었다. 최초의 유학생, 최초의 신식 학교 입학자, 최초로 신식 결혼식을 올린 사람 등. 그 와중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의사 이름도 알아두자. 박 에스더. 결혼 전 이름은 김점동이다.

그녀는 1876년 서울에서 태어났어. 아버지 김홍택은 선교사 아펜젤러 등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고용돼 일했고 덕분에 서양 문물의 세례를 빨리 받은 사람이었지. 어느 날, 이화학당이라는 여성 교육기관이 설립됐다는 말을 들은 그는, 총기 있는 셋째 딸을 입학시키기로 마음먹는다. 대단한 결심이었지.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 눈알을 빼서 삶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시절이었거든. 그래서 설립자 스크랜턴은 병자나 버려진 아이들을 겨우 데려와 공부시키던 상황이었지.

ⓒ시사IN 이명익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을 반대하는 이화여대 졸업생들이 졸업장 반납 시위를 하고 있다.

이화학당에서 김점동은 타고난 총기를 발휘한다. 세례명을 에스더로 받은 그녀는 특히 영어에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다. 그 덕분에 이화학당 설립자 스크랜턴이 남녀유별의 조선 사회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병원 ‘보구여관’의 통역으로 활약하게 되었어. 그러던 어느 날 서양 의사들이 한 언청이(입술갈림증) 소녀를 훌륭히 고쳐내는 걸 보고는 무엇에 홀린 듯 인생의 행로를 결정해버린다. “나는 의사가 되겠다.” 그때 김점동의 나이 15세였지.

그녀가 의사의 길로 매진하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먼저 여자 나이 ‘이팔청춘’ 16세가 당시에는 결혼 적령기였어. 그 나이를 넘어서면 본인이나 부모에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소문나던 시대였지. 결국 김점동의 어머니는 선교사들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여러분이 에스더의 신랑감을 찾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라고 해도 결혼을 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러자 김점동과 함께 일하던 여의사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홀이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박유산이라는 조선 청년이 있어요.”

박유산은 원래 윌리엄 홀의 마부로 고용된 사람이었어. 당연히 서울에서 행세깨나 하던 김점동의 집안에선 눈꼬리가 올라갔지. 그 아버지가 훈장이었다고 하지만 박유산은 집 나온 떠돌이에 선교사 마부 일을 하던 마뜩잖은 사윗감이었다. 하지만 김점동은 단호했어.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습니다.”

두 사람은 1893년 5월 결혼한다. 김점동은 17세, 박유산은 26세였다. 이윽고 둘을 결혼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윌리엄 홀이 병사하는 바람에 아내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김점동 부부는 소원이던 공부를 하기 위해 로제타 일행과 동행하게 됐어. 남편 박유산은 농장과 식당에서 막노동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했지.

ⓒ이화역사관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더(김점동).

그렇게 4년이 흘러 김점동은 졸업을 눈앞에 두게 됐다. 그러나 고된 노동에 지친 박유산은 그만 폐결핵에 걸리고 아내가 졸업시험을 치르기 3주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아. 박유산의 묘비명에는 이런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 나를 영접하였고(마태복음 25장 35절).” 내 생각에 이 구절은 부인 박 에스더(그녀는 세례명 에스더와 남편의 성을 써서 박 에스더라고 불리게 돼)가 고른 게 틀림없다. 결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던 꿈 많은 17세 조선 처녀의 암울함이 떠올랐겠지. 그 정처 없고 오갈 데 없는 나그네의 손을 잡아준 남편이 얼마나 고맙고 또 미안했을까.

그녀는 의사가 되자마자 조선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남편에게 해주지 못한 보답을 조선의 여성들에게 베풀어. 병원에 앉아 환자들을 본 것뿐 아니라 여성 환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두메산골까지 나귀를 타고 찾아갔다. 여성 환자들이 돌팔이 의사 한번 보지 못하고 죽어가던 시대였다.

박 에스더를 기리며 크리스마스실 만들어

하지만 10년간 과로와 혹사를 거듭하던 그녀의 육체에도 남편을 죽인 폐결핵이 찾아든다. 결국 박 에스더는 34세라는 한창 나이에 서둘러 남편 뒤를 따르고 만다.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 박 에스더와 남편은 그렇게 모두 폐결핵의 희생자가 됐지만, 그 부부의 삶을 지켜봤던 셔우드 홀(로제타와 윌리엄의 아들)은 이모처럼 여기던 박 에스더의 죽음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하게 되지. “반드시 결핵 전문의가 되어 조선의 결핵 환자들을 돕겠어요.”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은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이다. 오늘날 이화여중·고등학교,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로 이어지는 130년 역사는 우리나라 근대 여성사, 여성운동사, 인물사와 상당 부분 겹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야.

최근 이화여자대학교는 풍파를 겪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단과대학 설립을 두고 이를 강행하려는 학교와 저지하려는 학생들 간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어. 아빠는 대학이 학위를 사고파는 시장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충분한 준비 과정과 내부 합의 없이 직장인 대상 단과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학교 측 방침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그런데 반대하는 목소리 사이에 이화여대의 ‘학벌’을 강조하는 소리가 미세하나마 새어나오는 것엔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울러 ‘대학이 벌이는 학위 장사’에 반대한다면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 간의 연대와 확장이 필요할 텐데 ‘순수 이화여대’만 강조하는 것도 의아했지.

ⓒ이화역사관 이화학당 보통과 1학년 학생들의 산수 시간 수업 모습.

어찌 되었든 아빠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들의 130년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으며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바란다. 신분의 높낮이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반려를 구하는 파격을 택했고, 또 그 남편의 희생적인 연대를 통해 뜻을 이루었으나 자신도 조선의 불쌍한 환자들을 위해 몸을 바쳤던 김점동 같은 선배들이 있으매 이화는 이어질 수 있었고, 또 130년 동안 피어날 수 있었을 테니까. 하나 더. 김점동은 이화의 네 번째 학생이었어. 세 번째 학생은 스크랜턴 여사가 버려진 콜레라 환자들 틈에서 거두어온 소녀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을 도왔던 조선인 인부들은 스크랜턴 여사가 내미는 품삯을 받지 않았다고 해. “우리가 버린 아이를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저희가 어찌 그 삯을 받겠습니까.”

이화, 즉 배꽃은 결코 홀로 피어난 것이 아니었단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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