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어떤 이유로 시위에 나서거나 누군가와 맞서 싸울 때 많이 등장하는 찬송가가 있다. 찬송가 38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라는 노래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로 시작되는 후렴구를 들려주면 너도 ‘아 그 노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만큼 유명한 노래지.  

원래는 19세기 미국에서 의용 소방대의 노래로 만들어졌다고 해. 이후 미국의 남북전쟁 때 북군의 군가로 널리 불리게 되지. 이 노래의 제목은 좀 특이했어. ‘존 브라운의 시신(屍身· body)’이었으니까. 노래 가사는 군가답게 단순해. “존 브라운의 시신은 무덤에 잠들고”를 세 차례 반복한 뒤 후렴구가 나온다. “글로리(영광) 글로리 할렐루야… 그의 영혼은 전진하고 있다(His soul is marching on).”

북군 병사들은 이 노래를 열렬히 부르며 행진했다. 그럼 이 흔하디흔한 이름 존 브라운은 누구일까? 왜 그는 북군의 우상이 되었던 걸까?  

ⓒ위키백과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든 모습의 존 브라운(가운데).

존 브라운의 아버지는 독실한 청교도이자 열렬한 노예 해방론자였다고 해. 아버지의 공장은 흑인들을 도와 탈출시키는 비밀 조직의 아지트로 즐겨 쓰였다. 존 브라운 자신도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의 어느 날 짐승처럼 학대받는 흑인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 “인간이 인간에게 저럴 수는 없다!”

당시 노예 문제로 미국은 거의 정신적인 분단 상태에 있었단다. 노예 옹호론자들과 노예 폐지론자들은 새로운 주(州)가 연방에 가입할 때마다 그 주를 노예 허용 주로 가입을 허락할지, 노예 폐지 주로 할지를 놓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어. 유명한 건 역시 ‘피의 캔자스’(1854 ~1861)라 불리는 유혈 사태일 거야. 새로이 연방에 가입하는 캔자스 주를 놓고 노예 옹호론자들과 그 폐지론자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 대치에 들어갔어. 양측은 모두 대량의 이주민들을 투입하여 캔자스 주를 장악하려 들었고 그 와중에 치른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졌으며 이어서 피바람이 불게 돼.  

일단의 노예제도 옹호론자들이 1856년 5월 로렌스 시를 습격해 노예 폐지론자들을 살해한다. 이는 그때껏 잠자고 있던 한 호랑이의 수염을 뽑은 격이었어. 문제의 존 브라운, 열렬한 노예 해방론자이던 존 브라운이 행동에 나선 거야. 존 브라운은 그의 네 아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을 모아 노예제 옹호론자들을 습격해. 피해자의 집을 찾아간 브라운은 문을 열어준 여주인에게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남자들을 데려가겠다고 얘기했지만 그 뒤 여주인은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지. 그런 식으로 다섯 명이 죽어나갔어.  

이 사건을 미국 역사에서는 포타와토미 학살이라고 불러. 이 사건 이후 ‘피의 캔자스’는 더욱 피비린내를 풍기며 사람들의 목숨을 잡아먹었어. 하지만 존 브라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자신의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라 믿었던 그는 남부의 심장부 버지니아의 산악 지역 일부를 점령하고 탈주 노예들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꿈을 꾸게 돼. 존 브라운은 자신의 아들들과 지지자, 해방 노예 등을 모아서 연방군 무기고를 점령한다.

연방군 무기고를 점령했다는 것은 연방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어. 후일 남군의 총사령관이 되는 로버트 리가 이끄는 연방군은 당장 존 브라운 일행을 공격한다. 교전 와중에 존 브라운의 아들이 총을 맞는데, 고통을 호소하는 아들에게 브라운은 “남자답게 죽어라”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해. 저항은 장렬했지만 오래가지 못했어. 체포된 후 사형을 선고받지만 그는 재판정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노예를 살리기 위해, 힘으로써 노예 소유자에게 간섭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다!”

탈옥할 기회까지 뿌리치고 “순교자가 되겠다”라며 열정적으로 털어놓은 그의 마지막 연설은 노예제 폐지론자에게는 깊은 감동을, 노예제 옹호론자에게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가져다준다.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존 브라운은 오도된 광신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 나와 내 자식들의 피가 고통받는 노예들의 피와 섞여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할 것이다”라고 기염을 토하던 존 브라운의 모습을 마냥 미치광이로 몰기에는 어딘가 좀 꺼림칙한 구석이 있지. 이 꺼림칙함은 미국의 위대한 시인이자 수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예 해방을 위해서 브라운과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이 나와도 나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유냐 죽음이냐의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 박애주의자보다는 브라운과 같이 노예의 처지를 대변하는 박애주의자를 택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메갈리안을 욕할 수 있을까?

아빠가 존 브라운이라는 19세기 미국 사람을 불현듯 떠올린 건 최근 몇 주간 치열하게 전개된 ‘메갈리안’ 논쟁 때문이야. 여성에게 지극히 폭력적인 사회를 비판한다는 뜻에서 일부 여성들은 ‘미러링’이라는 형태로 매우 도발적인 언어를 사용해 남자들과 남성 중심 사회를 공격했고, 공교롭게도 여러 사태가 맞물리면서 그야말로 격렬한, 심지어 살벌하기까지 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단다. 존 브라운의 행동 역시 노예제 존치론자들이 흑인에게 저질렀던 범죄의 미러링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메갈리안이 존 브라운과 같다는 뜻이 아님. 단지 ‘미러링’의 차원에서일 뿐). 네가 <엉클 톰스 캐빈>에서 봤듯 흑인에 대한 노예주들의 만행은 극에 달해 있었고 노예제도 자체의 비인간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영혼을 옥죄고 있었으니까. 존 브라운은 그 악행을 그대로 ‘미러링’해서 노예 옹호론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사IN 이명익 5월26일 서울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현장에서 영정 모양의 거울을 든 여성들이 피해자를 추모하는 침묵 시위를 하고 있다.

아빠는 개인적으로 존 브라운의 행동에 비판적이고, ‘광신도’라는 링컨의 평가에 동의하는 편이야. 무엇보다 그 행동이 노예 해방에 도움이 되었는가의 문제에서도 회의적이고 노예제도 반대건, 평등한 세상이건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인간에 대한 존중, 즉 휴머니즘일 텐데 가족이 보는 앞에서 사람을 도살한 그의 행동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존 브라운의 미러링만을 비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구나. “노예 해방이고 뭐고 다 떠나서 존 브라운은 미친놈이고 나쁜 놈이야”라고 말하기는 쉬우나 노예제도라는 거대한 사회적 굴레이자 이데올로기를, 지금의 우리든 당시의 미국인이든 과연 ‘떠나서’ 판단할 수 있을까?

아빠는 ‘메갈리안’들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아. 상대의 추함을 비추는 ‘미러링’은 곧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모방하며 괴물이 돼가는 ‘윈도잉’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존 브라운처럼 직접 행동에 나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에 공감하거나 의견이 비슷하다 해서 범죄 집단의 일원으로 매도되는 현실에는 찬성하지 못하겠다. 하물며 그들이 미러링의 형태로 비추는 그들보다 훨씬 강력한 남성 중심 사회의 추악함 앞에서, 그리고 너를 포함한 여성들이 여전한 세상 속에서 느껴야 하는 공포 앞에서,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메갈리안은 문제 있는 집단이라고 손가락질하기에는 뒤통수가 조금 따갑구나.   

네 오빠가 새벽 몇 시에 들어오든 제때 연락만 하면 베개를 높이 하고 자지만, 네가 도서관에서 나올 때는 밤 10시든 11시든 그 앞에 가서 기다리는 아빠로서는 “여자를 약 먹여서” 어떻게 한다는 남자들의 키득거림과 “씹치남들 납치해서 뭘 어떻게” 한다는 메갈리안의 악담은 결코 같은 무게일 수 없으니까. 후자는 불쾌한 소음이지만 전자는 불안한 현실이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