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서울 북가좌동에 신혼집을 얻었다. 5년 전 연애 시절에도 우리는 북가좌동에서 살았기에 낯설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서울 생활을 1년쯤 했을 때였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가 15만원인 다가구 주택 옥탑방을 얻었다. 아내의 집은 옥탑방 창문을 열면 보이는 골목 저편에 있는 빌라였다. 중간에 경기도 파주에서 2년을 살다가 결혼해서 북가좌동에 돌아오니, 산책길에 그 옥탑방을 자주 보게 된다. 아직 그 자리에 낡은 채로 있는 건물의 주인아저씨는 나와 동향이었다. 나는 백석의 시 〈고향〉을 떠올리곤 했다.

“나는 북관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그곳 의원은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백석은 그의 손길과 웃음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옥탑방의 주인아저씨에게서도 나는 아버지를 느꼈고, 아버지의 친구도 느꼈다. 그는 옥상에 작은 텃밭을 가꾸었는데, 상추며 방울토마토, 달래 같은 것들을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다. 나는 감사히 넙죽 따서 먹고 뽑아 먹었다.

나는 아내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부모님이 조금이라도 도와줘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건 차이가 큰 것 같아.”

아내는 동의한다.

“시작부터가 다르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우리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모으고, 비장하며 척박하게 살지 않기 위해 적당히 써가며 살고 있다. 전남 여수에서 서울 북가좌동까지 어떻게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을 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나는 다시 시를 찾아 읽는다. “고향이 전남 벌교에/ 터 잡은 곳이 구로동이다 보니/ 수없이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맨 처음은 스무 살이었다/ 가방이 없어 종이백 세 개에 잔뜩 옷가지가 담겨 있었다/ 스물셋 두 번째 상경 땐/ 큰 가방 하나에 작은 가방 두 개였다/ 십여 년이 흘러 다시 내릴 땐/ 한 여인과 갓 돌 지난/ 조그만 아이가 내 옆에 있었다.” 서울에 갓 올라와 이 시를 읽고서 책상 모퉁이에서 울고 말았다.

“창피하다고 젊어서는 안 들고 가겠다 했지만/ 체면보다 생활이 먼저임을 깨달아갈 무렵엔/ 조기거나 양태거나 떡이 꽁꽁 얼려 있는/ 상자 두어 개를 낑낑거리며/ 들고 내려왔다 어떤 땐 잎 지는 가을이었고/ 어떤 땐 조용히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송경동 〈지나온 청춘에 바치는 송가-영등포역 연가〉). 나도 이제 고향에 내려갔다 오는 길엔 “됐어, 먹을 거 많아” 이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낑낑거리며 들고 기차에 오른다. 먹고사는 일이 체면보다 먼저임을 북가좌동에 다시 정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체면보다 생활이 먼저임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는 요즘 작은 텃밭을 일군다. 아주 좁은 테라스에 의자 두 개를 놓고 거기에 앉아 책을 읽는다. 생각나면 텃밭에 물을 준다. 첫 경작은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망했다. 상추는 웃자랐고 고추는 잘 열리지 않는다. 토마토는 잘 자란다. 아내와 나는 지금 당장은 적어도 행복하게 살도록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는 또 이 북가좌동에서 들려오는 사람 소리, 아이 우는 소리, 차 빼달라고 경적 울리는 소리가 그리워질까. 긴 시간, 등본에 수없이 주소를 남기며 돌아다니다가 간신히 아내를 만나 사랑을 하고 한 주소에 살게 됐다. 버티자, 버티고 살자,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북가좌동의 이 오래된 집에서 일어나는 일 말고는,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2016년 여름이 지나간다.

기자명 백상웅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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