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로봇공학,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생명과학 등 새로운 과학기술과 관련된 용어들이 일상 언어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최근엔 이런 신기술에 기반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까지 국내외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사실 ‘4차 산업혁명’은,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사용되어온 명칭이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인더스트리(Industrie) 4.0’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의미하는 핵심 내용은 통합과 융합이다. 그간 정보통신 기술을 생산과정에 본격 적용하려는 노력은 있었다. 이런 신기술의 적용은 주로 기계·공정·공장·산업·국가(지역)별 등 각 경계 안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컴퓨터 기술 및 인터넷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종전의 경계(기계·공정·공장·산업·국가)를 넘어서는 통합과 융합의 흐름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통합과 융합은 단지 생산과정 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생산과 사무, 금융과 유통 사이의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또한 이런 통합의 중심에 인공지능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이미 빅데이터와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알파고’처럼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는 것)을 결합해서 모든 제조 및 물류 과정을 분석하고 통합하는 자동화 과정이 상용화 단계에 들어섰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경우, 원자재를 들여와 생산한 철강을 국내외 수요처로 운송하는 모든 단계를 사물인터넷으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이미 실행 중이다. 기계 간·공정 간, 그리고 생산에서 운송에 이르는 여러 단계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얻고 관리할 수 있다면, 제조에서 물류에 이르는 전 과정을 획기적으로 효율화하고 조정할 수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지금 기대하는 수준으로 발전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수리 담당자 말고는 사람이 필요 없다. 이런 통합과 융합의 과정을 개별 공장은 물론 그 앞뒤의 금융과 유통으로 확대해서 사실상 전 사회 영역을 연결한다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내용이다.

ⓒAP Photo미국 아칸소 주 쌀 경작지의 추수 모습. 미국은 농업인구가 전체의 2%에도 못 미친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 혁신(증기의 동력화)’과 기계에 의한 생산을 1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20세기 초 미국을 필두로 도입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2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정보통신 기술의 혁신과 발전은 3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최근 시작된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은 인공지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과 정보통신 기술(3차 산업혁명)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나오고 있다. 우선 인공지능을 정보통신 기술의 최종 도달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 경우, 인공지능은 3차 산업혁명을 마무리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인공지능을 기존 정보통신 기술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기술혁명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인공지능이 정보통신 기술의 최종 도달점’이라는 시각은, 그동안 진행되어온 일자리 부족과 양극화 및 소득불평등이 앞으로 더욱 본격화하리라는 비관적 전망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인공지능을 새로운 기술혁명으로 보는 경우에는, 과거 산업혁명들이 그랬듯 새 기술인 인공지능이 결국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희망을 표명하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어떤 관점이 좀 더 현실을 반영하는지 미리 판단하기 어렵다. 최소한의 합리적 예상이 가능한 가까운 미래를 두고 본다면, ‘인공지능 혹은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창출하기보다 기존 일자리를 파괴하는 경향이 훨씬 강할 것이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인공지능이 자본주의 근간 흔들 수도

1차 산업혁명이 제조업의 육체노동 일자리를 창출했다면, 2차 산업혁명은 사무관리직 일자리를 새로이 만들었다. 3차 산업혁명에서는 서비스 산업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로봇기술과 인공지능은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기에 앞서 농업·제조업·서비스업 가릴 것 없이 모든 산업에서 생산능력을 극대화(인간 노동자를 퇴출)하는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인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 기술로 인해 퇴출되는 노동자에게 새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기술 바깥의 산업 영역이 과거의 산업혁명들에 비해 매우 협소하다는 뜻이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제공2009년 노동절 대회 현장에서 참가자들이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피켓을 들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농업인구는 전체의 2%에 못 미친다. 그런데도 농업 생산은 과잉 상태다. 이 같은 사태가 농업뿐 아니라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포함한 모든 산업 영역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한 사회의 물질적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인구(=노동 수요)가 모든 산업에서 감소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제리 캐플랜 스탠퍼드 대학 교수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간은 필요 없다”. 일본의 한 문학상에서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예선을 통과한 사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심지어 예술 부문도 성역이 아니다. 만약 이런 과정이 전면적으로 진행되어, 인구의 다수가 점점 더 일자리와 소득(구매력)을 얻을 수 없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 중 하나가 ‘시장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능력은 양적·질적으로 급격히 팽창하는데, 수요(판매 시장)는 오히려 줄고 있다.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는 이런 생산능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규칙 중 하나는, 소득을 ‘시장에서의 고용’과 연계시키는(고용되어야 임금 형태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것이다. 그런데 시장이 시민들을 체제 유지에 충분히 고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고용과 소득의 연계라는 규칙을 고수해야 하는 것일까? 이 규칙을 고집하다 보면, 4차 산업혁명 자체가 실현되지 못하거나 혹은 재앙으로 끝날 것이다. 즉,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 노동과 소득 간의 연계를 상당 정도 끊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

시장을 통하지 않고 대중의 구매력(소득)을 유지하는 방식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기본소득을 포함한 보편적 복지다. 비록 새로운 기술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다 해도 최근 유럽 각국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것은 미래를 위한 좋은 참고 자료이다. 다른 한 길은 사회적 가치는 충분하나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노동에 대해 ‘사회적 임금’을 지급하는 방안이다. 예를 들어 전업주부(남자든 여자든 간에)의 가사노동에는 ‘가정을 유지한다’는 사회적 가치가 충분하다. 그 가치를 인정해서 사회적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 이 범주에는 봉사활동, 양육, 부양 등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다양한 노동이 포함된다.

인구 증가 둔화와 인공지능 기술이 사회적 재앙이 될지 또는 노동시간의 획기적인 감소를 포함한 인간 삶의 향상으로 이어질지는 적절한 분배 방식을 찾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

기자명 유철규 (성공회대학교 교수·경제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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