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구글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프로 바둑기사가 펼친 세기의 대국 이후 글로벌 차원에서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인공지능과 함께 거론되는 ‘4차 산업혁명’이 뜨거운 주제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의 대주제가 바로 ‘4차 산업혁명 이해하기’였다. 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큰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재계 인사들이 감지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3차 산업혁명을 전제로 해서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 짚어보자. 3차 산업혁명은, 1960년대에 시작되어 1990년대까지 반도체, 메인 프레임 컴퓨팅 및 PC, 인터넷 발달로 이어진 디지털 혁명으로 규정된다. 이른바 ‘정보사회화’나 ‘디지털사회화’ 등이 3차 산업혁명에 따라 개막되었다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서비스, 3D 프린팅, 자율주행 자동차와 드론 같은 무인 운송수단, 신재생 에너지, 인공지능, 로봇공학 등 신기술들의 혁신적이고 융합적인 발전을 통해, 3차 산업혁명으로 발생한 인류 사회의 변화를 더 심화시킨다.

전통적인 산업과 기업, 시장의 영역과 역할이 무너지거나 재조정되는 것도 4차 산업혁명의 커다란 특징이다. 가령 구글·애플 같은 정보통신 업체가 자율주행 자동차 시장이나 로봇 산업을 주도한다.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이 드론 산업을 이끌어나가는가 하면 인공지능 탑재 스피커 ‘에코’로 사물인터넷 영역을 확대하기도 한다. 이런 혁신적 기업들은 단순히 자신이 참여한 시장 내에서 ‘파이’를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과감하게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간다.

ⓒ연합뉴스7월8일 강릉시 경포해수욕장에서 튜브를 단 드론이 출동해 인명구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이미 시장의 강자라 할지라도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지위를 잃는다. 카메라 필름을 만들었다가 파산한 코닥이나, 2G 폰의 강자였다가 몰락한 노키아의 전철을 밟게 되리라 보인다. 국내 기업과 산업은 이러한 대격변에 잘 대비하고 있는 것일까?

흥미로운 내용의 슬로건이 적힌 플래카드가 도로 위 육교 벽면에 걸려 있던 시절을 기억한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1997년에 터진 외환위기의 충격과 여파가 한창이던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쯤이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정보(통신산업)화’를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벤처산업 육성에 집중했다. 집권 1년차인 1998년에 이미 산업발전법을 제정해 정보통신, 신소재 등 새로운 지식산업 육성을 뒷받침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 개통 같은 인터넷 인프라의 구축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른 시기에 단행된 업적이었다. 정책 당국자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즈음 외환위기로 실직하거나 조기 퇴직한 가장들의 다수가 PC방을 열어 생계를 이어갔으니, 인터넷 인프라의 구축은 일종의 사회안전망 구실까지 떠맡았던 셈이다. 국내 온라인 게임 산업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천년(2000년)은 세계적인 닷컴 거품의 붕괴와 함께 찾아왔고, 국내에서도 제품·산업·시장의 혁신을 열망하거나 자신하던 정보통신 벤처 사업체들이 줄줄이 무너져갔다.

‘산만한 열거’에 그친 박근혜 정부 성장동력

이후 노무현 정부가 지정한 ‘10대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을 구성하는 주요 영역에도 부합했다. 지능형 로봇, 미래형 자동차, 차세대 전지, 디스플레이, 차세대 반도체, 디지털TV·방송, 차세대 이동통신, 지능형 홈네트워크, 디지털 콘텐츠·소프트웨어 솔루션, 바이오 신약·장기 등 지금도 글로벌 첨단산업으로 분류되는 분야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산업기술보다 오히려 금융 서비스 부문에서 개발 의지를 뚜렷이 했다. 결국 ‘소득 2만 달러’ ‘동북아 금융허브’ 따위 거창한 구호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첨단산업보다 펀드 거품과 부동산 투기 쪽으로 국가 역량이 왜곡되는 지경에 빠지고 만다. 당시 생명공학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까지 ‘황우석 스캔들’로 사라지고 말았다.

ⓒ연합뉴스삼성은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으로 시장이 재편될 때 ‘빠른 추격자’ 전략을 통해 살아남았다.

그러나 한류 등 국내 대중문화 콘텐츠 산업과 온라인 게임 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업적이다. 자유화된 사회정치적 분위기가 밑거름이 되었다. 네이버·다음 같은 국내 인터넷 전문 기업과 인터넷 생태계가 크게 성장하고 모양을 갖춘 것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대운하’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녹색성장’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가 경제적으로 우선순위를 둔 것은 4대강 정비사업 등 토건 분야였다. 이명박 정부는 인터넷 관련 산업이 발전하기 위한 토양인 자유로운 분위기조차 조성하지 못했다. 집권 초기의 글로벌 금융위기와 광우병 집회 이후 권위주의 기조를 강화하며 인터넷과 언론을 옥죄었다. 신재생 에너지, IT 융합 시스템, 로봇 응용, 나노 융합, 바이오 제약 등 신산업을 ‘17대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지정한 것은 좋았지만, 정작 정부의 관련 정책은 거꾸로 갔다. 종전의 과학기술부를 교육인적자원부와 통합하면서, 독자적인 과학기술 정책의 추진 및 관리의 동력을 위축시켜버린 것이다.

ⓒ연합뉴스알파고 열풍이 불자 지난 3월17일 청와대는 ‘지능정보사회 민관합동 간담회’를 열었다.

‘창조경제’를 주창한 박근혜 정부 역시 2015년에 미래 성장동력으로 지능형 로봇, 착용형 스마트 기기, 가상훈련 시스템, 스마트 자동차, 지능형 반도체,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19개 영역을 제시했다. 4차 산업혁명의 진행과 전망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부합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임기 종료를 1년6개월여 앞둔 지금까지도 현실화할 방안은 거의 내놓지 못하고 있어서 ‘산만한 열거’에 그칠 뿐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세계적 차원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신호라 할 수 있는 큼직한 ‘혁신’이 잇따라 일어났다. 애플이 스마트폰 시대를 개막했고, 구글은 무인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7년 국내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업그레이드된 제품 개발로 세계 가전시장의 강자가 된 삼성은 2000년대 후반, 애플의 시장 재편(휴대전화에서 스마트폰으로)으로 잠시 주춤거리다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통해 노키아의 전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업이익 측면에서 보면, 애플이 삼성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있다. 더욱이 세계에서 큰 시장 중 하나인 중국에서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이 계속 추락하고 있다.

이런 정황들로 알 수 있듯 4차 산업혁명에서 국내 업체들의 전망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다. 선진국인 미국·유럽·일본 등에서는, 기초적인 기술력과 창의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업체들이 꾸준히 세계적 대기업으로 떠오르면서 신산업을 선도한다. 중국 기업들은 거대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정부의 정책 목표에 일사불란하게 호응하며 점차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새로운 시장을 주도하거나 창출하는 ‘혁신적’ 기업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신산업들의 기본 중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센서 산업도 너무 취약하다.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지금까지도 큰 위기감을 체감하지 못한다. 비교적 탄탄한 인터넷 인프라로 인해 ‘대한민국이 정보화에서는 앞서갔다’는 과신과, 스마트폰 등에서 글로벌 브랜드로 떠오른 ‘삼성 착시효과’ 때문이다. 정부는 말로만 신성장 산업을 육성할 것이 아니라 정책을 현실화해야 한다. 한 산업을 제대로 육성하려면 상당히 긴 시간과 정책적 연속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정권들은 스스로의 참신성에 대한 인상을 고려해서인지 매번 이전 정권에서 만든 정책이나 정부 조직을 쉽사리 무시하거나 변경해버렸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매번 성장동력 산업을 새롭게 재편해 정책의 장기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은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정책의 구체적 현실화’와 ‘정책의 장기 지속성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

개발독재 시기인 1960~1970년대에는 정부가 산업정책 및 금융통제로 민간 부문을 ‘경제발전 전선’에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설사 정부에서 청사진을 제대로 만든다 해도 이에 민간 부문이 순조롭게 부응할지 장담할 수 없다. 소수의 대기업 중심으로 빠른 추격 전략이 가능했던 과거와 달리, 4차 산업혁명을 구성하는 신산업들은 단단한 기초기술 역량과 혁신적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 장기간 축적된 기초연구 역량,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적 환경, 벤처기업이 기술력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대기업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미국형 산업 생태계의 장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인공지능 분야 연구자의 경우, 중국에서 매년 2000~3000명이 배출되는 데 비해 국내 연구자는 해외 박사를 포함해 한 해 20~30명에 그친다. 오히려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인공지능 부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수의 인재가 몰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이 끊기자 관련 연구 역시 지속되지 못했다. 현재 국내 대표 기업들 중에는 내로라하는 인공지능 관련 기술을 보유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구글은 2001년부터 인공지능 및 관련 분야에 280억 달러(약 33조원)를 투자했고, 일본 도요타 역시 10억 달러로 인공지능연구소를 설립했다. 일본 소프트뱅크는 이미 인공지능 로봇을 상용화해서 백화점 등에 배치한 상태다. 중국에서는 포털사이트 회사 바이두가 3억 달러를 투자해서 미국 실리콘밸리에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은 대부분 관련 서비스의 계획이나 개발 단계에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나마 삼성전자가 인공지능 관련 스타트업에 480억원 정도를 투자한 상태다

인공지능 투자액 미국·일본의 ‘10분의 1’

정부 차원에서 보면 미국은 2013년 세운 ‘브레인 이니셔티브(BRAIN Initiative)’ 전략하에 매년 30억 달러(약 3조5000억원)를 이 부문에 투자하고 있다. 일본은 인공지능 기반 로봇혁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해부터 1000억 엔(약 1조500억원)을 인공지능 분야에 투입했다. 한국은 ‘알파고 충격’ 직후인 지난 3월,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분야를 포함하는 지능정보 산업에 5년간 1조원가량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선진국의 5분의 1에서 10분의 1 수준이다. 삼성전자·LG전자·SK텔레콤·KT·네이버·현대자동차 등 6개 기업이 참여하는 지능정보기술연구소도 설립하기로 했다.

좀 늦긴 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러한 산업정책 구상 및 연구인력 육성 투자와 더불어 스타트업들의 창조적 재능이 재벌체제의 독점구조나 정경유착에 질식되지 않도록 제도적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대기업들은 과거 고도성장기의 유물인 ‘빠른 추격자 전략’의 관성에서 환골탈태해 ‘창의적 선도자’ 혹은 ‘새로운 시장 형성자’로서의 체질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4차 산업혁명이 경제성장의 새로운 동력이 될지언정 고용과 소비, 빈부격차 등의 부문에서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분석도 충분히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를 감안해서 좀 더 총체적으로 생산과 고용, 소비를 선순환시킬 수 있는 경제구조를 모색해야 한다.

기자명 장진호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사회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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