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의 본고장 한국은 아카이빙(기록)도 비평도 실종된 나라다. “모든 음악의 ‘아이돌화’가 진행되고, 주류 음악 자체가 아이돌 산업의 막강한 지배력 안에 편입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김영대 음악평론가)”데도 누구 하나 아이돌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유의미하게 다루지 않았다. 무관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들끓는 ‘팬덤’을 어려워하는 것이 하나, ‘돈 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문화가 두 번째다.

이렇다 보니 “케이팝의 현재를 외국인들이 기록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케이팝의 작사·작곡 정보를 확인하려면 외국어로 된 사이트를 찾는 게 빨랐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아이돌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하는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외국 팬들이 본토 의견을 참고하고 싶어도 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돌 관련 기사를 영문으로 작성해 해외로 기사를 내보내는 몇몇 매체가 다루는 뉴스도 ‘숨 막히는 뒤태’나 ‘스캔들’에 머물렀다.

국내 아이돌 팬덤이 느끼는 갈증도 비슷했다. 음원 사이트 멜론의 인기 순위 1~100위를 ‘유행가처럼’ ‘배경음악처럼’ 무심히 듣는 사람들에 비해, 아이돌 팬덤 중 상당수는 음악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비평에 목마른 이들이기도 하다. 음악 비평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존재는 일종의 ‘금맥’이나 마찬가지다.

ⓒ연합뉴스 <아이돌 연감 2015> 6월2일 한류 확산을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KCON 2016 France’ 문화 공연 장면.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학을 공부하던 미묘(본명 문용민)씨가 2014년 아이돌 음악 전문 비평 웹진 ‘아이돌로지(idology.kr)’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름 그대로 진지하게 ‘아이돌학(學)’을 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아이돌에 관심을 가졌다. 직접 음악을 만들기도 하는 미묘씨는 아이돌이 내놓는 작업물의 사운드와 기법을 ‘구경하다가’ 팔을 걷어붙이게 됐다. “아이돌이 등장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여전히 아이돌을 만드는 시스템이나 걸그룹으로 대표되는 성 상품화에 대한 관습적이고 공격적인 평론뿐인 것이 안타까웠다. 아이돌 음악에도 제대로 된 비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현업 평론가들과 필자들을 모아 팀블로그 형태로 사이트를 꾸렸다.

주력한 것은 ‘퍼스트 리슨(1st listen)’ 리뷰다. 열흘 단위로 음원 사이트를 체크했다. 고작 열흘 사이에도 장르를 망라해 500곡 넘는 음원이 쏟아졌다. 그중 아이돌 음원을 골라 아카이빙하고 짧게 리뷰를 붙였다. 시장이 치열하다 보니 소규모 기획사의 아이돌 중에는 음원을 냈다가 기록이 지워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오피셜’ 뮤직비디오마저 삭제되곤 했다. 이 휘발성 강한 콘텐츠를 기록으로 남길 방법이 없을까.

궁리 끝에 나온 결과물이 최근 아이돌로지가 펴낸 첫 출판물 <아이돌 연감 2015>다. 책으로 기록한 2015년의 아이돌 생태계라 할 만하다. 2015년 발매된 아이돌 음반 426장을 목록화하고, 아이돌 산업의 경향을 담았다. 생소한 아이돌 그룹의 이름도 많다. 책의 왼쪽 페이지는 한글로, 오른쪽 페이지는 영문으로 작성했다. 미묘씨는 “아이돌로지의 파급력이 크진 않지만, 해외 팬이 한국 아이돌 관련 자료를 찾았을 때 읽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아이돌 연감 2015> 편찬 작업을 한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

갓 데뷔한 신인들에 대한 통계 자료는 인포그래픽으로 정리했다. 2015년 데뷔한 총 66개 그룹(걸그룹 43팀 202명, 보이그룹 23팀 137명)의 음반 발매 월별 분포와 일별·요일별 분포, 평균 연령과 평균 신장, 출생 연도와 출신 지역부터 별자리 분포 같은 사소한 정보까지 아카이빙했다. 이를 위해 필자 대부분이 달라붙어 기획사마다 전화를 돌렸다. 그야말로 ‘막노동’이었다. “왜 하시는 건데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나름 설명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아이돌에 대한 비평과 아카이빙은 아직까지 한국에서 ‘낯선’ 영역에 속한다. 미묘씨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아이돌로지가 하는 일을 납득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몇 개월 사이에도 문 닫고 없어지는 기획사가 수두룩했다. 그래서 2016년 연감은 올해 초부터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 왜냐고 묻는데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기록으로 남겨두는 건, 꾸준히 해마다 정리해놓아야 자료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는 통계지만 아이돌에 대한 어떤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남자 아이돌의 경우에는 특히 키에 민감하다. 어차피 일정 부분 속이기도 한다. 책에 실린 통계가 아주 정확하다기보다는 ‘우리가 아이돌에게 이런 것들을 기대한다’에 가까운 통계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이를테면 남자 아이돌은 키 170㎝ 이하로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 통계로 추측해볼 수 있다.”

행사 전용 아이돌 그룹의 등장

음반 목록을 정리하며 발견하게 된 새로운 ‘아이돌 신(scene)’도 있었다. 이른바 행사 전용 아이돌이다. 지역·대학 축제 등 행사 시장이 커지면서 행사 전용 아이돌 그룹이라는 ‘독자적인 시장’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밤비노의 ‘오빠오빠’가 대표적이다. 인터넷 방송인 아프리카TV에서만 활동하는 걸그룹도 있었다. 기획사 이름이 검색 안 되는 경우도 있는, 대개가 소규모 회사에서 내놓은 이 아이돌들은 방송에서 1위를 하겠다거나 팬덤을 구축하는 걸 목표로 삼기보다 행사를 많이 해서 수익을 올리는 것을 추구한다.

“아이튠즈와 스포티파이가 케이팝 카테고리를 신설한 지금, 아이돌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으며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제부터다.” 시장도 팬덤도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다. 2015년 아이돌 시장은 ‘리셋’과 ‘확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발라드·힙합·록 등 기존 아이돌의 영역이 아닌 곳까지 아이돌의 활동 범위가 급격히 넓어진 해이기도 하다.

‘국민 아이돌’ 시대도 갔다. 아이돌의 타깃은 일반 대중보다는 적극적으로 지갑을 여는 코어 팬층으로 이동했다. 아이돌 솔로 시대 원년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그룹 멤버의 솔로 활동이 ‘붐’을 이룬 것도 2015년이었다. “혹독한 연습생 시절 뒤에 눈부신 정식 데뷔가 존재하는 것처럼, 실전을 통해 산전수전 다 겪은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엿한 대중가수로 재탄생한다. 전에 없던 가요계의 새로운 성장 서사다(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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