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네 시험 범위가 독립운동사 영역이더구나. ‘무슨 사건이 이리도 많으며 웬 단체들이 이리도 복잡하냐’며 네가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아빠도 참 안타까웠다. 사실 그 이름들에는 정말 많은 사람의 피눈물과 땀방울과 살덩이가 맺히고 흐르고 매달려 있다. 그러나 너에게는 고달픈 암기의 대상일 뿐이라니…. 하긴 어쩌다 성명이나 단체 이름에서 글자 하나라도 틀리면 감점의 수렁에 빠져버릴 테니, 너에게는 독립운동사가 함정처럼 여겨지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꼭 기억하기 바란다. 달걀로 바위치기보다 더 가망 없는 싸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떨쳐나섰다는 것을. 그들이 이름 없고 빛나지도 않으면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어가면서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만, 사실 아빠에게도 역사 시험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아빠는 오늘날 네가 배우는 교과서보다는 훨씬 단순하고 ‘간편한’ 국사 교과서로 공부했을 거다. 아빠가 배운 국정교과서에는 독립운동의 반쪽이 송두리째 뜯겨 나가 있었거든.

20세기 최대의 사건을 들어보라고 하면, 사람과 나라에 따라 천 갈래 만 갈래의 답이 나오겠다만, 아빠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좋다. 사회주의 혁명을 긍정한다기보다, 그 사건이 1917년부터 1991년까지 소비에트연방(소련)이라는 거대한 실험으로 이어져 20세기 전체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의미니까. 러시아혁명을 이끈 이들은 무산계급의 사회주의 혁명뿐 아니라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외치며 그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각 나라의 민족주의자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주는’ 존재였지.  

ⓒ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김원봉·여운형(왼쪽부터)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조차 오랫동안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왔다.

간간이 철저한 공산주의자도 있었겠지만 대개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수단으로 그 이념을 수용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강렬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지.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그는 공산당 활동을 했어)에 대해 레닌이 평한 말은 그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이동휘 동지는 조선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를 실행할 방도는 갖고 있지 않소.”

즉,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은 대단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이론 같은 건 별로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야.

3·1 항쟁 이후 조선에서,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중국에서 벌어진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은 독립운동사의 거대한 봉우리로 솟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이 목메어 찾던 나라가 결국 남북으로 갈라지고 서로 수백만명씩 죽고 죽이며 철천지원수가 되는 비극 속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쌓아올렸던 웅장한 봉우리는 깎이고 풍화되고 갈아엎어져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지가 되고 말았단다.   

아빠도 교과서에서 6·10만세운동은 배웠다. 그러나 그 주모자로 체포됐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숨져간 권오설 같은 이의 이름은 알지 못했어. 그는 조선공산당의 맹장이었거든. 중국 공산당을 도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혁혁한 공을 세우고 죽어간 윤세주 같은 사람 역시 아빠가 읽었던 교과서에는 그림자도 비칠 수 없었다. 원산 총파업은 외웠지만, 그 주동자였던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이주하의 이름 역시 알지 못했다. 이주하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후퇴하는 남한 당국의 손에 즉결 처형되고 말았으니까.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돌이켜보자. 조선 학생 박준채가 사촌 여동생을 희롱하는 일본 학생에게 정의의 주먹을 날린 것이 이 운동의 시작이라고 배웠지? 그런데 조선 전역에서 수시로 발생하던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패싸움’이 어떻게 3·1운동만큼이나 식민통치체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을까? 몇몇 지도자가 광주 학생들에게 ‘진정한 적은 멋모르고 까부는 일본 학생 나부랭이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라고 각인시키며 광주 학생들의 분노를 묶어 세웠기 때문이었어. 장재성이라는 이도 그중 하나였지. 하지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영웅 장재성도 기약 없는 역사의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됐다가 경찰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까.

ⓒ연합뉴스 한 야당 의원이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위)에게 김일성 외삼촌 서훈에 대해 따졌다.

‘빨갱이 관련 없음’ 입증해야 하는 후손들

이런 상황이었으니, 만주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 동력이 거의 상실되어가던 1937년, 대담하게 국내로 쳐들어와 국경 마을 보천보를 점령했던, 그래서 당시 <동아일보>가 호외를 내 이 사실을 알릴 만큼 온 조선을 흥분시켰던 나이 스물다섯의 ‘장군’ 김일성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영화 <암살>의 주인공이자 독립운동의 영웅인 김원봉, 중도 좌파라 해야 마땅할 여운형의 이름조차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였어.   ‘국민 정서상’ 김일성에게 협조했거나 하다못해 그 비슷한 부류들까지도 용납할 수 없다는 서슬은 그렇게 우리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반토막내 왔단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독재 정권들이 물러가고 민주화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에야, 못난 후손들의 이념 싸움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부인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일었고, 이동휘 등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 일부에 대한 서훈이 겨우 이루어졌다.

그런데 며칠 전 한 야당 의원이 국회에서 보훈처장에게 “어떻게 김일성의 외삼촌에게 서훈을 할 수 있느냐”라고 따지는 일이 벌어졌어. 김일성의 외삼촌은 독립운동의 근거가 명확한 사람이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 대한민국 헌법이 금하고 있는 연좌제가 아니더라도, 김일성의 외삼촌은 광복 이후 김일성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의미다.

그 야당 의원의 속내는, 서훈 과정의 부실함을 지적하면서 지금까지 내내 지극히 수구적인 행각을 되풀이해온 보훈처장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의원은 우리 역사를 반토막내 왔던 녹슨 칼날인 연좌제나 좌익에 대한 ‘국민 정서’라는 케케묵은 흉기를 다시 들이민 셈이 됐어. 보훈처는 당장 김일성 외삼촌의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나섰다. 그 여파로 수십 년 동안 탄원하고 호소해서 바로잡았던 일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서훈마저 위태롭게 될지도 모른다. 제 발등을 찍어도 분수가 있고 제 머리털에 불을 붙여도 정도가 있지, 나름 진보 정당 활동을 했다는 야당 의원의 일탈은 너무나 뼈아프고 괘씸했다.  

그 의원이 ‘나는 잘못한 거 없다’고 버티는 모습에 붉으락푸르락하는 와중에 아빠는 한 선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돼. “우리 조부님은 ‘이’ ‘득’자 ‘환’자 쓰시는 어른인데 미국 교포 사회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신 분이야. 우리 조부님 활약을 증언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고 기록도 엄연히 남아 있어. 그런데 보훈처는 해방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고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니 그 행적을 우리 가족더러 입증하라고 하더라고.”

보훈처의 이야기는, 혹시 해방공간(1945~ 1948)에서 북한을 도왔을지 모르니 그렇지 않다는 걸 가족이 입증하라는 거다. 이쯤 되면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쳐다보기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가족도 버리고 일신의 안위도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조카가 무슨 짓을 할지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행여나 알았다면, 자신의 후손들이 명백히 남아 있는 아버지(또는 할아버지)의 공을 인정받기 위해 사립탐정이라도 고용해서 ‘빨갱이와 죽을 때까지 관련 없었음’을 입증해야 하리라고 짐작했다면, 그래도 그들은 과연 그놈의 나라를 찾고 싶었을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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