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선말손’이라고 불렀다.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손’이라는 뜻이다. 무언가 정성 들여 가꾸고, 키워내고 살려내는 건 나와는 영 거리가 먼 능력이었다. 고양이들은 배가 고프면 밥을 달라고 보채거나 사료 봉지를 찾아내 뜯어먹기라도 하지. 그런데 벌써 몇 년째 텃밭을 가꾸는 친구가 종종 SNS에 자랑 삼아 올리는 사진을 보며 조금씩 마음이 동했다. 내가 과연 식물들을 키울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나처럼 서투른 초보들을 위해 화분과 흙, 씨앗에 심지어 이름표까지 세트 상품을 파는 곳이 제법 있었다.

머릿속이 점점 때 이른 상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파스타를 자주 만들어 먹으니 바질을 키워야겠다. 잎을 따서 바로 음식에 넣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볕 좋은 일요일 오후에는 페스토를 만들어야겠어. 한 팩을 사면 다 못 먹고 버리기 일쑤인 방울토마토도 키우자. 혼자 사는 살림이니까 파를 키우다가 음식 만들 때 필요한 만큼만 잘라서 넣어도 좋겠지? 당근은 한 번에 하나를 다 먹기 힘든데, 미니 당근은 그때그때 하나씩 뽑아서 먹으면 되겠다! 그렇게 음식 재료로 쓸 생각을 하며 바질과 파, 앉은뱅이 방울토마토와 미니 당근 재배 세트를 샀다. 일단 창가에서 화분에 길러보고 나중에 옥상으로 진출해야지. 상상 속의 나는 이미 원숙한 농부였다. 화분의 허브를 툭 따서 요리에 넣는 영국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못지않았다.

소꿉장난감 같은 화분 세트의 포장을 풀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설명서를 읽으면서, 거대하게 부풀었던 상상이 푹 꺼지고 그제야 ‘선말손’인 내 자신이 보였다. 이거 싹이라도 틔울 수 있을까. 화분에 흙을 채워넣고 조심스레 씨를 심었다. 설명서에는 구멍 하나에 씨앗을 두세 개만 심으라고 했지만 혹시 싹이 안 나올까 봐 대여섯 개씩 넣었다. 아직 밤바람이 차던 때라 퇴근한 뒤 화분을 방에 들여놓았다가 다음 날 출근하기 전 창가에 다시 내놓고 물을 주었다. 싹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만 년은 걸리는 것 같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마침내 바질 화분에서 연두색의 작은 싹을 발견했을 때의 두근거림과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너무 작고 여렸다. 1㎜도 되지 않은 가녀린 게 흙을 뚫고 나오다니. 손을 잘못 스치면 금방 죽어버릴 것 같았다. 곧 당근도, 파도, 토마토도 싹을 내밀었다. 일단 흙 밖으로 나오는 데에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녀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맹렬히 커나가기 시작했다. ‘생명의 경이’라는 흔한 말이 이렇게 충만하고 무거운 뜻이었다니.

약하고 가난한 목숨은 하찮은가

방울토마토는 꽃을 잔뜩 피워낸 후 열매가 열 개나 달렸다. 옆에는 화분이 좁아서 답답해 죽겠다는 듯 당근들이 흙 위로 삐죽삐죽 올라와 있다. 바질은 놀랄 정도로 쑥쑥 자라 꽃대도 높이 솟았다. 파는 아직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란 건 아니지만 제법 굵어지는 중이다. 친구 한 명이 내게 ‘초록손’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화분에 물을 주는 아침, 나는 분노로 들끓고 있을 때가 훨씬 많다. 눈 뜨자마자 접하는 부고 뉴스 때문이다. 고작 화분 하나에도 조건과 정성이 필요한데, 사람 목숨은 왜 이렇게 쉽고 하찮게 취급하고 소모해버리는가. 왜 약하고 가난할수록 더 그런가. 왜 열아홉 살의 청년이 혼자 일을 하다 죽고 왜 젊은 여성이 이유 없이 화장실에서 칼을 맞아야 하는가. 왜 아직 고등학생인 청년이 과로에 시달리다 절망 속에서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 작은 새싹 하나가 품고 있는 생명의 경이가 왜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이 얼마나 순진해 보일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얘기가 너무 순진해 보이는 세상이야말로 잘못된 세상 아닌가.

기자명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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