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강의하신 분들의 말씀을 요약해보자면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두 가지인 것 같다. 미래 사회에도 살아남을 직업을 갖거나, 아니면 영생 불사할 기업을 찾아 취업하거나. 9급 공무원 시험을 보는 데 한 해 수능 응시자 수(60만명)의 3분의 1 가까이가 몰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예측하고 직업을 선택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부터 묻고 싶다. 당신은 과연 초등학생 때 20년 뒤를 내다보고 지금의 직업을 선택했나? 내 여동생이 간호사인데, 각종 미래 예측에 따르면 간호사는 앞으로 20년 뒤에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유망 직업이다. 그런데 내 동생이 과연 이런 미래 가능성을 보고 간호사가 되었을까? 전혀 아니다. 그저 동생은 사춘기 시절부터 몸이 약한 엄마를 돌봐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봉사가 적성에 맞는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들기 전 15년가량을 교직에 있었는데, 내가 교사직을 선택한 유일한 이유는 닭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내게 시켰던 고된 노동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였다(웃음). 내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1989년엔 교사 인기가 좋거나 봉급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직업 조사에서 교사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26위가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교사가 외환위기(IMF 구제금융)를 거치며 대학생이 선호하는 직업 1위로 탈바꿈한 것이다.

ⓒ시사IN 윤무영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사춘기 아이들의 ‘자기존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되고 만개할 수 있게 도와주라고 부모들에게 조언한다.

배우 김여진씨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책(<내가 걸은 만큼만 내 인생이다>)이 인상 깊었다. 김씨는 연극을 하면서 연기에 빠져 지낸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월급이 8만원에 불과했던 당시, 끼니는 라면으로 때우고 극단이 있던 대학로에서 집(신촌)까지 지하철도 못 타고 걸어다녀야 했지만 늘 자부심이 넘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그녀는 주연배우와 자기 처지를 비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짜증을 내게 됐다는 것이다.

김씨가 변한 것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명동에서 벌어진 결식아동 돕기 캠페인에 참여한 그녀는 모금을 위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동안 그간의 질투심이나 경쟁의식이 모두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 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10년만 가난할 결심을 하자. 남들 다 가는 흔해빠진 길 말고, 내가 원하는 길을 10년만 걸어가면 그 편이 훨씬 의미 있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멋지지 않나.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펴낸 <찾았다 진로>에서는 직업을 선택할 때 첫 번째 지침으로 ‘좋은 일자리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갖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할 것’을 제시한다. △자기 재능이나 적성에 맞는가 △사회적 가치에 부합하는가 △경제적 독립을 이룰 수 있는가가 그 기준이다. 두 번째 지침으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길에서 만나는 실패를 수용하자는 것이다. 진로와 관련해서 실패나 우연한 사건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프 고인스가 쓴 <일의 기술>을 보면 싱가포르에서 출산도우미 회사를 운영 중인 지니라는 여성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대입 시험을 망친 이 여성은 도피차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났다가 거기서 만난 부유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둘 사이에 덜컥 아이가 들어선다. 아이를 원치 않았던 남자는 지니에게 창업자금을 대줄 테니 낙태를 하라고 제안한다. 그녀의 오랜 꿈이 창업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고국으로 돌아와 낙태를 하려던 지니는 수술 전날 밤에 마음을 바꾼다. 임신한 딸을 수치스러워하던 부모와 달리 고모와 할머니가 “뭐든 도와줄 테니 우릴 믿으라”고 나섰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은 뒤 미혼모로 힘겹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녀는 온라인에서 알게 된 외국인 친구로부터 “당신이 조산사를 하면 참 좋을 것 같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당시만 해도 싱가포르에서는 조산사라는 직업이 생소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움직인 지니는 그간 해오던 비서 일을 때려치우고 조산사의 길로 본격 나서게 된다. “당신이 옆에 있어준 덕분에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낳았다”라는 산모들의 말이 그녀를 더욱 고무시켰다. 오늘날 지니는 임산부를 위한 각종 출산·육아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관련 용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의 CEO가 되어 활기차게 살고 있다.

아이들 발달단계와 따로 노는 진학정책

이 얘기에서 주목할 것이 바로 실패의 경험이다. 모든 것은 지니가 대입 시험을 망치면서부터 시작됐다. 남자친구가 낙태의 조건으로 내건 창업 제안을 거절하고 미혼모의 길을 택한 뒤 그녀는 남자에게는 물론 부모나 사회로부터도 외면받았다. 그러나 대신 그녀는 자기를 돕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할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았다. “뛰어내리면 그물이 나타난다”라는 경구대로, 궁지에 몰리면 없던 답도 생겨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체득했다. 덕분에 그녀는 창업을 하겠다던 애초의 꿈을 결국 실현했다. 온갖 실패와 예기치 않은 우연들이 오늘의 그녀를 만든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안전한 길로 이끌어주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미래가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것을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아이들이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꺾이지 않는 의지, 올바른 판단력, 사람에 대한 감수성, 이타심…. 이런 것들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보통 중학교 때만 되면 우리 부모들이 아이 의지를 꺾어버리곤 하지 않나. 그럼에도 부모가 아이의 진로를 위해 꼭 해주셨으면 하는 일들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다.

먼저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말한 ‘5단계 욕구 이론’에 따라 어릴 적엔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 대한 욕구’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를 채워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춘기 단계부터는 ‘자기존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되면서 이것이 만개할 수 있게끔 도와주시라. 우리 아들은 중학생이 됐을 무렵 엄청나게 퇴행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걸 보면서 ‘내가 아이를 충분히 사랑했던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어릴 적 발달 단계 중 한 부분이 무너지면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 같다.

나아가 부모는 아이 스스로 진로를 탐색할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 얼마 전 동생 부탁을 받고 조카의 진로 상담을 한 일이 있다. 사춘기인 조카의 꿈은 세 가지. 가수·사진작가·의사라고 했다. 그런데 의사는 성적이 안 따라주고, 사진작가는 사진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어서 안 될 것 같아 그중 가수를 하는 걸로 마음을 정했단다. 그래서 ‘넌 가수가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고 했다. 하다못해 엄마나 친구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일도 없다고 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공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학벌·학력 등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운동을 펼쳐왔다.

이날 나는 조카에게 가수가 되겠다고 지금부터 음악학원에 다닐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대신 지금부터 열심히 노래 연습을 해서 엄마나 친구한테 들려주고, 스마트폰으로 아무 사진이나 찍는 연습을 해보라고 했다. “아무것도 결정하려 하지 말고 뭐든 다 해봐.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적절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때가 올 거야.” 그랬더니 아이는 몹시 기뻐했다.

뭔가를 해봐야만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내가 그 일을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있다. 이런 시도는 해보지도 않은 채 가슴속에 계속 소망만 품고 있는 상태는 위험하다. 자기가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직접 부딪치다 보면 그 속에서 에너지와 의욕이 계속 터져 나온다.

문제는 현행 진학정책이 아이들의 진로 발달단계와 따로 논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중학생은 자아 정체성을 세우고 자신의 진로를 조금씩 탐색해나갈 연령대에 있다. 그런데 지금의 고입 정책은 이 아이들에게 특목고·마이스터고·일반고 중 어디를 갈 것인지는 물론 그에 따른 인생 계획까지 미리 세울 것을 요구한다.

마이스터고에 지원할 때 요구하는 서류 양식을 잠깐 보여드리겠다. “본교 입학 후 미래 에너지 마이스터로 성장하기 위한 학업 계획 및 목표와 졸업 후 진로 계획에 대해 서술하시오.” 여기에 한 학생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재학 중 전기기능사 자격증 및 가산점을 받을 수 있게 하고, 다른 자격증 또한 순차적으로 취득하겠습니다.” 이게 취업준비생이 쓰는 글이지, 중학생 수준에서 쓸 수 있는 글인가?

이런 글을 쓰게 하려면 결국 아이를 잡아야 한다. 발달단계고 뭐고 다 무시한 채 벽돌 찍듯 아이를 규격에 맞춰 찍어내야 하는 것이다. 아이를 잡으려면 부모 마음부터 지옥으로 변해야 한다. 그러니 부모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아이 고유의 발달단계를 지켜줄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요구하는 진학정책에 맞춰 순응할 것인가. 여기에서 난 전자를 선택했다. 특별한 의식이 있어서 특목고·자사고를 안 보낸 게 아니라, 중학생 때는 자기만의 시간을 줘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이다.

“하고 싶은 일 해, 굶지 않아”를 이번 진로학교 표어로 내걸면서 내부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당신네가 보장할 수 있어? 책임질 거야?”라는 비난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웃음). 다들 알다시피 한국은 실패를 관용하지 않는 나라다. 이런 현실에서 돈과 안정성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하라는 것은 무책임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 생계와 삶의 안전판을 위한 사회복지적 배려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우리 주장이다.

“삶이 돈보다 먼저다”

다만 돈과 안정성이 삶의 목적일 순 없다는 것이다. “삶이 돈보다 먼저”라고 강조하는 강지원 변호사는 “지금 한국의 못된 고용 풍토와 노동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략) 다만 이런 현실을 개선해나가는 것 못지않게 자신을 계발해나가는 것 또한 엄중한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람이 이 땅에 올 때는 독특하게 수행해야 할 목적과 이유를 갖고 태어난다고 나는 믿는다. 돈과 안정성은 그 목적과 이유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단체 또한 마찬가지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경우 지난 8년간 “입시 경쟁으로 죽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을 꿈꾼다”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달려왔기에, 돈이 없다고 크게 좌절한 일이 없다. 이번에도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선포하고, <웃어라, 수포자!> 책자를 시중에 배포하는 데 최소 8000만원이 들 것 같다고 호소했더니 회원들이 이 중 97%를 모금해주셨다. 눈물겹다.

그럼에도 나는 모금을 권하는 게 전혀 미안하지 않다. 덕분에 모금에 참여한 우리 모두의 삶이 복되고 풍요해질 테니까. 우린 앞으로도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가는 진로 개척자들을 적극 독려할 것이다. 학벌·학력 등으로 사람을 줄 세우고 차별하는 현실을 바로잡고자 출신학교차별금지법(가칭) 등을 만들고 제도를 바로잡는 운동 또한 중단 없이 벌일 것이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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