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가 종언을 알렸다. 6월28일,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치매약 복용 사실이 알려지면서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신동주·신동빈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1년째 지속되는 데다, 그룹과 사주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는 또 다른 악재다. 그룹 내부 ‘교통정리’에 더 이상 신 총괄회장의 의중이 중요하지 않게 되면서 형제간 진흙탕 싸움이 한층 더 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신격호 시대’의 종언은 한국 재벌사의 한 페이지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 총괄회장은 국내 재벌그룹 가운데 경영 일선에 영향을 끼쳤던 마지막 1세대 창업주다. 일제강점기 시절 재일조선인 1세대로 일본에서 사업을 키웠고, 한국에 투자를 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그런 신격호 시대의 롯데와 지금의 롯데는 그룹 규모와 주력산업 면에서 성격이 전혀 다르다. 신격호식 경영을 바탕으로 몸집을 불려온 ‘신격호 월드’가 변화와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는 것이다.

ⓒ시사IN 이명익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왼쪽)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오른쪽)을 끌어내리려다 세 차례 실패했다.

신비주의 깨진 ‘신격호 월드’

1960년대 한국에 진출한 신격호 총괄회장은 다른 재벌 창업주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달리 신 총괄회장은 신비주의 전략을 취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벌이는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오너의 정체성이 부각되면 소매업 분야 매출에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디어 노출을 꺼렸고, 이런 성향은 한국 진출 이후에도 이어졌다. 또 신 총괄회장은 차입을 최대한 피하는 현금 중시 경영을 했다.

그런데 두 아들의 경영권 분쟁으로 신격호 총괄회장의 신비주의 전략이 무너져내렸다. ‘왕자의 난’으로 신격호·신동주·신동빈 등 사주 일가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사주뿐 아니라 일본 롯데홀딩스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신동주·신동빈 형제 중 누가 롯데홀딩스를 차지하느냐가 경영권 분쟁의 핵심이다. 언론의 관심이 롯데홀딩스에 모아졌고, 이 과정에서 롯데홀딩스의 최대 주주인 일본 광윤사가 언론에 노출되었다. 롯데홀딩스의 지분 28.1%를 갖고 있는 광윤사는 신씨 일가의 가족기업이다. 아직 베일 속에 가려져 있지만, 재계에서는 사실상 페이퍼컴퍼니로 보고 있다.

한국 롯데 순환출자의 핵심은 호텔롯데다. 호텔롯데를 중심으로 한국 롯데그룹은 67개 (2015년 12월 기준) 순환출자 고리가 뒤엉켜 있다. 이마저도 2015년 4월 기준 459개에서 대폭 줄여낸 결과다. 여전히 한국 재벌그룹 가운데 순환출자 고리가 가장 많다. 일본 롯데홀딩스와 신격호 일가가 바로 이 호텔롯데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롯데그룹’ 주요 지분도를 보면 일본 롯데홀딩스는 호텔롯데의 지분 가운데 19.1%를, 일본 L투자회사연합(12개 투자회사 연합체)이 72.7%를 보유하고 있다(48쪽 〈표〉 참조). L투자회사연합의 지분 100%가 롯데홀딩스 소유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가 롯데그룹 전체 경영권 판도를 결정짓는다.

1년 동안 롯데의 지분구조는 언론의 단골 뉴스가 되었다. 롯데는 한국에서도 여전히 소비재 산업이 그룹의 핵심을 차지한다. 자칫 대중의 반감을 자극할 경우, 매출과 확장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롯데그룹의 후진적 지배구조가 기업 이미지를 까먹고 있는 상황이다.

‘빚 없는 사업’에서 ‘몸집 부풀리기’로

신격호 총괄회장은 철저히 보수적인 경영인이다. 신격호 회장이 롯데를 이끌던 2000년, 금융감독원은 롯데그룹의 결합재무제표상 부채비율을 86.8%라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자본금보다 빚이 더 적다는 의미였다. 당시 금융감독원이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부채비율은 200%였다. 롯데는 금융 당국이 권장하는 기준치보다 훨씬 ‘빚 없는 사업’을 한 셈이다. 계열사 가운데 상장회사도 드물어 2016년 현재까지 상장회사는 9개에 불과하다.

현금 중시 경영은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지 않고 안정적인 소비재 중심 사업에 골몰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에 의존했다는 비판도 있다. 롯데그룹은 초창기 확보한 현금자산을 바탕으로 부동산 선점의 특혜를 누려 자산을 키운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1970년대 서울 소공동 을지로 호텔롯데 부지, 1980년대 잠실 롯데월드 부지와 영등포 롯데백화점 부지 등 주요 역세권을 미리 선점하며 기반을 넓혔다.

ⓒ연합뉴스지난 5월16일 서울대병원을 찾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그의 치매약 복용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그러나 차남 신동빈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신격호 총괄회장과 달랐다. 신동빈 회장은 공격적인 M&A(기업 인수합병)에 거리낌이 없었다. 2004년 기준 23조3000억여 원에 불과했던 그룹 전체 매출은 2015년 기준 68조2000억여 원까지 불어났다. 2007년 말 43개에 불과했던 전체 계열사도 2016년 4월 기준 93개로 10년 사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신동빈 회장이 그룹 정책본부 본부장에 오른 2004년 이후 M&A의 큰손으로 나선 결과다.

급격한 성장 과정에 따른 후유증도 나타났다.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계열사 간 차입 규모가 늘었고,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연이어 발생했다. 롯데그룹을 수사 중인 검찰도 신씨 일가가 따로 소유 중인 회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를 파헤치고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신격호 총괄회장의 장녀 신영자 전 롯데쇼핑 회장의 BNF 통상, 신 총괄회장의 셋째 부인 서미경씨와 연관된 유원실업, 유기개발 등이다.

신격호 치매약 복용, ‘양날의 칼’

롯데그룹 내부 교통정리는 아직 요원하다. ‘신격호 월드’의 총체적 위기를 점치는 이들도 있다. 무엇보다 경영권 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6월25일 일본 롯데홀딩스에서 열린 임시주주총회에서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은 동생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끌어내리려다 실패했다. 지난해 8월, 올해 3월에 이어 세 번째 시도였다. 신동주 회장 측은 주총 내 최대 캐스팅보트인 종업원지주회(27.8%)의 지지를 얻기 위해 추가적으로 주총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종업원지주회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검찰 수사에 따라 국면이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경영권 분쟁의 또 다른 축은 신격호 총괄회장의 성년 후견인 지정 문제다. 지난해 12월 신격호 총괄회장의 동생인 신정숙씨가 신 총괄회장에 대한 성년 후견인 지정을 서울가정법원에 신청했는데, 이에 대한 6차 심리가 8월10일 예정되어 있다. 신 총괄회장은 그동안 법원이 요청한 정신감정을 거부해왔는데, 이번에 치매약 복용 사실이 알려지면서 후견인 지정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법원이 확인해줄 경우, 경영권 분쟁에서는 신동빈 회장이 다소 유리해 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이 그동안 정상적인 경영 참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검찰 수사에 따른 모든 책임을 신동빈 회장이 져야 한다.

반대로 신동주 쪽은 신격호 총괄회장의 치매 사실이 확인될 경우 타격을 입게 된다. “아버지가 나를 후계자로 선택했다”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다. 긍정적 면도 있다.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게 확인되면 신 총괄회장이 검찰 수사에 따른 형사처벌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신동주 측이 신 총괄회장의 치매약 복용 사실을 전격 공개한 것은 양날의 칼로 해석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의 최대 변수는 검찰의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다. 7월1일 검찰은 신영자 전 롯데쇼핑 대표를 소환조사했다. 총수 일가 가운데 첫 조사 대상이다. 백화점·면세점 입점 비리가 주된 수사 대상이지만, 신씨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도 함께 수사할 방침이다.

한때 롯데는 ‘직접 외자를 벌어와 조국에 투자하는 자랑스러운 애국 기업’으로 꼽혔다. 하지만 신격호 성공 스토리의 결말은 ‘막장 드라마’로 끝나는 분위기다. 경영권 다툼이라는 ‘내우(內憂)’에 검찰 수사라는 ‘외환(外患)’까지 겹치면서 1세대 창업주 신격호 시대는 끝내 씁쓸한 종언을 맞고 있다.

ⓒ연합뉴스지난 6월15일 새벽 검찰 직원들이 롯데건설 본사 건물에서 압수한 자료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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