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U와 영국 덮친 브렉시트 후폭풍

영국 청년들이 분노하는 까닭

현실적인 보수주의자, 테레사 메이 신임 총리

브렉시트에도 꺾이지 않은 코빈 지지세

트럼프와 힐러리의 ‘브렉시트 손익계산서’

 

브렉시트 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 영국노동당 제러미 코빈 대표는 “진정한 쟁점은 ‘유럽연합(EU) 탈퇴냐, 잔류냐’가 아니다. (EU가 강제하는) 긴축정책을 앞으로도 그대로 시행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브렉시트 논란으로 갈라진 영국 시민들의 마음을 다시 이어줄 정당은 보수당의 긴축정책에 맞서 싸워온 노동당뿐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국민투표 결과는 노동당에도 위기다. 노동당 지지 기반이, EU 탈퇴에 투표한 북부 지역의 옛 공업지대 노동자들과 EU 잔류를 열렬히 지지한 런던의 청년 세대로 양분되고 말았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정치 구도를 ‘긴축 대 반긴축’ 전선으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는 코빈의 메시지에는, 양분된 지지 기반을 다시 단결시켜야 영국 사회의 진보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고심이 담겨 있다.

노동당만 위기를 겪는 것이 아니다. 국민투표 결과만 놓고 볼 때 노동당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입은 쪽은 보수당이다. 캐머런 총리는 사임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보수당은 조기 총선이 실시되지 않을 경우 2020년까지 총리를 맡을 새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그런데 보수당은 최상층 지도자들까지 잔류파와 탈퇴파로 확연히 갈려 있다. 보수당 내 분파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노동당이 단합해 제대로 싸운다면 노동당 지지층이 다시 결집할 수도 있다.

ⓒAFP노동당 의원 상당수는 영국 노동당 제러미 코빈 대표(오른쪽)가 대표로 당선될 때부터 마뜩잖게 여겼다. 이들은 ‘제3의 길’과 단절하고 런던 금융세력과 싸울 계획을 짜는 코빈 대표를 몹시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가능성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진흙탕 싸움이 보수당이 아니라 노동당에서 먼저 벌어진 것이다. 노동당 하원의원 중 상당수는 지난해 코빈이 대표로 당선될 때부터 그를 몹시 마뜩잖아했다. 그들이 국민투표에서 노동당 당론인 ‘EU 잔류’ 패배의 책임을 코빈에게 전가하면서 대표직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원과 조합원, 지지 대중 등으로부터 60%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선출된 대표에게 취임 1년도 안 돼 사임하라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당내 쿠데타’다.

노동당의 예비 내각 각료들이 줄줄이 사퇴하는 가운데서도 코빈은 꿋꿋이 버텼다. 그랬더니 6월28일 의원단 총회에서는 총 229명의 노동당 소속 의원 가운데 172명이 코빈을 불신임했다. 이 불신임 투표에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이미 노동당 안팎에서는 대표 선거 재실시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코빈은 다시 출마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사실 느닷없는 쿠데타는 아니었다. 코빈의 대표 당선 직후부터 언론들은 의원단의 압도적 다수인 반(反)코빈파가 그의 임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어떤 짓을 벌일지 주목해왔다. 전임 총리인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노선을 따르는 반코빈파 의원들은 ‘그가 대표로 있는 한 노동당이 결코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당 대표가 너무 급진적이라서 중간층 표를 끌어올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객관적인 근거가 결여된 억지 주장이다. 코빈이 대표가 된 후 노동당은 보궐선거에서 내리 승리했다. 런던 시장 선거에서도 이겼다. 국민투표 직전에는 노동당 지지율이 보수당을 앞서기도 했다. 당원 수는 1년 사이에 20만명에서 38만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반코빈파 의원들이 진짜 염려하는 것은 코빈 대표 아래서 노동당이 총선에 이길 수 없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코빈 대표 아래서도 노동당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다.

지난해 대표 선출 이후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코빈의 가장 막역한 동지인 존 맥도널 예비 내각 재무장관은 부지런히 정책 대안을 준비했다. 주된 내용은 영국을 다시 복지국가로 만들기 위해 국가가 강력한 복지·산업 정책을 펼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국 노동당의 기존 노선인 ‘제3의 길’과 과감히 단절하며 ‘시티(런던의 금융특구)’의 금융 세력과도 일전을 불사할 방침이었다.

북부 노동자와 남부 대도시 청년들의 ‘코빈’ 연대

반코빈파 의원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노선일지 모른다. 비록 겉으로는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기 힘든 정책이라서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속내는 자칫 이런 공약으로 코빈 정부가 들어설 경우, 금융 대기업과 친숙한 자신들이 그 집행 책임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연말에 조기 총선이 실시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반코빈파가 분당 위험까지 감수하며 설익은 쿠데타에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AFP반코빈파는 청년층이 국민투표 이후 코빈에게 등을 돌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양상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코빈 대표 사임 반대 시위를 벌이는 지지자들.

하필 지금이 거사 시점이 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지난해 코빈 돌풍의 주역은 청년층이었다. 이번 국민투표에서 청년들은 열렬히 EU 잔류를 지지했다. 반코빈파는 이들이 국민투표 결과에 실망해서 코빈에게 등을 돌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온건 좌파로 알려진 앤절라 이글 의원 같은 비(非)블레어파 인물을 코빈의 대항마로 내세울 수 있다. 반코빈 진영의 대주주인 블레어파는 자신들이 앞에 나서봤자 득표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쿠데타 세력의 이런 야무진 기대와는 달리 초반부터 형세가 만만치 않다. 예비 내각 집단 사퇴가 보도된 6월27일부터 겨우 이틀 동안 14만여 명이 코빈 대표 사임에 반대하는 청원에 서명했다. 국민투표 뒤엔 1만3000여 명이 노동당에 새로 입당했다. 이들 중 60%가 “코빈 지지”를 입당 사유로 적었다.

지난해 대표 경선에서 코빈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던, 140만 조합원의 유나이트(Unite)와 130만 조합원을 가진 유니슨(Unison) 등 주요 노동조합들이 다시 코빈 지지를 천명했다. 코빈 지지 운동은 심지어 양분된 노동당의 지지 기반, 즉 북부의 노동자 계급과 남부 대도시 청년들을 하나로 잇는 계기가 될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영국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발상지다. 물론 산업자본주의의 발상지기도 하다. 이 나라에서 신자유주의가 승리를 거두고 오래 지속된 이유 중 하나는 노동당의 굴종과 개종이었다. 지금 코빈 지지 운동에 결집한 노동당 당원, 노조 조합원, 지지자들은 이 수십 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으려 하고 있다. 그렇기에 향후 진행될 노동당 대표 선거는 분명 브렉시트 국민투표보다 훨씬 더 중대한 역사의 한 매듭이 될 것이다. 영국인들뿐 아니라 탈(脫)신자유주의를 꿈꾸는 전 세계 민중에게 말이다.

기자명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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