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U와 영국 덮친 브렉시트 후폭풍

영국 청년들이 분노하는 까닭

현실적인 보수주의자, 테레사 메이 신임 총리

브렉시트에도 꺾이지 않은 코빈 지지세

트럼프와 힐러리의 ‘브렉시트 손익계산서’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동차 여행을 갔다. 차에 연료를 넣고 가자고 했더니 일행이 프랑스까지 일단 가서 거기서 넣자고 했다. 그쪽이 더 싸다며. 별 대단한 사건은 아니지만, 내 의식이 가지고 있던 경계가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대륙에 한쪽 끄트머리가 붙어는 있으되 반도의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혀 있고 다른 삼 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실질적으로는 섬과도 같은 나라, 어딘가 다른 나라로 가려면 크게 마음먹고 비행기를 타야 하거나 아니면 배를 타고 가야만 하는 나라에서, 나는 거의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이 서식할 곳을 한곳으로만 한정시켜 살아가던 인생에서, 다른 곳으로 쉽사리 떠나서 살아갈 수도 있는 인생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꼭 필요한 것들을 대강 우르르 던져넣고 몰던 차를 끌고 일단 떠났다가 연료마저도 떨어지면 그때 넣으면 되는 것. 다른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놀라움이랄까.

그리고 이곳에서 좀 더 살면서 유럽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이동하며 살아가는지를 보고 부럽다 못해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수학여행을 가고 배낭여행을 가고 말을 배우고 그러다가 다른 나라 출신의 친구들을 사귀고 연애를 하고 공부를 하러 가고 취직을 해서 살고…. 유럽연합(EU) 회원국의 국민이기만 하면 다른 회원국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EU 설립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이니까.

ⓒREUTER6월28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결정에 반대하는 영국 청년들이 런던 국회의사당 앞에서 EU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75년에도 영국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남아 있을 것인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당시에는 67%가 잔류를 희망했다. 그 뒤 41년이 흐르고 영국인들은 이번에는 EU에서 탈퇴할 것을 선택했다. 사실, 젊은 세대는 얼결에 탈퇴를 당한 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연령에 따른 선택의 차이는 매우 극명하다. 여론조사 기관 ‘로드 애시크로프트’의 사전조사 결과에 따르면 18~24세 연령층의 경우 73%가, 25~34세는 62%가 EU에 남기를 희망했다. 반면 55~64세 연령층은 57%가, 65세 이상의 경우는 60%가 떠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결국 48대52라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EU를 떠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베이비부머(대략 1948년에서 1964년 사이에 출생한 이들)가 밀레니얼(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 정도에 태어난 세대)의 바람,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EU의 일원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꺾은 셈이 됐다.

밀레니얼 세대가 분노한 까닭

흔히 베이비부머를 복권에 당첨된 세대라고들 한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인구 폭발 시대에 태어나 경제성장 및 복지제도 확충의 혜택을 입은 세대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복지, 무상교육, 양질의 국민의료보험을 누렸다. 취업도 쉬웠다. 대학 교육도 무료였다. 좋은 시대였던 것이다. 계층 이동도 가능했다. 성공적으로 중산층에 진입한 이들은 모기지 제도에 힘입어 대략 20대 초반에 첫 번째 자기 집을 샀고, 40대에 큰 집으로 옮아갔고, 50대에는 세를 놓아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집을 하나 더 샀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풍족한 연금까지 받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로서는 도무지 누릴 방법이 없는 것들이다.

ⓒAFP영국 런던의 왕립원예홀에서 ‘EU 탈퇴’ 국민투표의 개표 작업이 진행되는 모습.

밀레니얼 세대가 분노하는 지점이 여기 있다. 베이비부머들이 밀레니얼들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인생을 누리느라 청년들 머리 위로 빚을 잔뜩 쌓아두고는, 밀레니얼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자유, 즉 유럽 시민으로 살아가고 회원국 28개 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며 그 안에서 살아갈 곳과 할 일을 선택하여 어떤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가능성마저 빼앗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고작 평균 16년인 사람들이 앞으로 평균 69년을 더 살아갈 사람들의 인생을 마음대로 결정지었다는 분노. 물론 밀레니얼 세대의 투표 참가율은 형편없었다지만, 그러니 투표도 하지 않은 주제에 할 말이 없을 거라지만, 하여간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부머들이 자기들에게 중지를 치켜들었다는 둥, 앞으로 베이비부머들에게 대중교통에서 절대로 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둥 매우 격앙되어 있는 참이다.

투표일이 목요일(현지 시각)이었고, 금요일 새벽에 결과가 나왔다. 토요일에 딸을 데리고 동네를 지나가는데, 매우 비싼 영국산 레인지로버 자동차에 타고 있던 젊은 청년 두 명이 우리를 향해 인종차별적 욕설을 내뱉었다. 짧지 않은 영국 생활에서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월요일 사무실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앞방의 영국인 변호사가 스페인인인 자기 아내도 토요일에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했다. 많은 청년이 EU에 남자고 했지만, 떠나고자 하는 청년들 역시 있는 것이고, 품었던 좌절과 분노를 외국인에게 풀고자 하는 청년도 있는 것이다.

영국은, 적어도 런던은 오랜 세월 외국인에게 꽤 열린 모습을 보여왔다. 출신이나 하물며 국적에 상관없이 수용하고 표면적으로는 차별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초등학생인 딸 세대에 이르면 같은 반에서 순수한 영국인(English)이 더 적어 보일 정도다. 이렇게 함께 자란 아이들이 섞여서 분쟁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 이러한 공존에 대한 희망이-EU가 결국은 서구 자본주의 기득권층의 유지에 이바지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EU 및 그 전신의 탄생 및 유지와 발전에 큰 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열여섯 살짜리 영국인 소년과 점심을 먹었다. 밀레니얼보다도 아래 세대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주민투표 당시 16세 스코틀랜드인은 투표를 할 수 있었다. 이번엔 여러 운동 및 청원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이 투표를 할 수 있었다면 EU에 남는 것으로 결과가 바뀌었을 거라는 뒤늦은 통계가 있었다. 이 친구에게 선거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억울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왜?” “투표도 못했는데 권리를 빼앗겼으니까요.” 이 선거가 앞으로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의식을 높일 것이라는 희망 섞인 분석도 나온다. 어디선가 희망을 찾아야 하는 시대다.

기자명 런던·김세정 (영국 GRM Law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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